내일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내일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7.03.2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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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이는 세상에는 없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검찰의 수사는 계속되고 있고, 마침내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7년 3월 21일 오전 9시 25분쯤 서울중앙지검 정문 청사 현관 앞 포토라인에 섰다.

그리고 내일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섣부른 예측이나 전망이 쏟아져 나오고는 있으나, 결과가 어떨지 인간은 미리 알지 못한다.

<수요단상>은 수요일자 지면에 실려 독자와 만난다. 혹자는 “수요일에 게재되니 <수요단상>이 당연한 것 아니냐”며 빈정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요단상>이 되기 위해 나는 신문 제작 일정에 맞춰 화요일에 글 쓰는 노동을 해야 한다. 이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요단상>을 수요일의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탄핵 이후 청와대를 나와 삼성동 사저로 늦은 퇴거를 하던 날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대신 전해진,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와 29글자로 간결하게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사이의 거리는 지극히 멀다. 차이 또한 심상치 않다.

화요일을 지나 수요일로 흐르는 이번 시간은 자욱하다. 일상에 역사적 무게가 더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화요일에 쓰는 <수요단상>은 참으로 애매하고 곤란하다.

`죄(sin)'와 `범죄(crime)'의 차이를 쉽게 구별하지 못하는 세태처럼 함부로 예단할 수 없는 불투명과 불안정 때문이리라.

양심과 도덕을 벗어나는 죄, 그리고 법규를 어기고 저지르는 범죄의 구별은 엄격해야 하며 그 `벌'과 `처벌'또한 막중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나 할 것 없이 기-승-전-국정농단으로 거듭되는 공간과 시간에 갇혀 지냈다. 그럼에도 촛불의 광장을 멈추지 않고 반복을 거듭했던 까닭은 이번 기회에 바꾸지 못하면 영원히 바뀌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과 용감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순실이라는 일반인의 개인적 탐욕이 시작과 끝일 것으로 여전히 믿고 싶은 사람도 숨어 있을 것이고, 실제로 삼성동 골목길에는 `마마'와 `각하'를 절규하며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는 사람들도 있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흐른다. 순간순간의 현재는 찰나에 과거가 되고, 고스란히 역사가 되면서 미래를 예감하고 또 희망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자연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밤을 새워가며 진행될 것인지, 또 구속되거나 사저로 돌아갈 것인지 내일의 일을 알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없다.

오늘 나는 상식적으로 예측하거나 기대 혹은 전망할 수 있는 나라를 전혀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짜증스러움이 폭발하면서 분노로 커지는 시간과 씨름하고 있다.

탄핵과 구속수사 등 처벌이 촛불의 궁극적 목표가 아님은 분명하다. 장미대선 운운하며 빠르게 정치권력의 향배에 대한 대중적 욕망으로의 전이는 타당하나, 이 또한 과정일 뿐. 우리가 끝내 이겨 도달해야 할 곳은 아직 멀었다. 다만 예측이 가능한 나라와 정권이 됐으면 싶다.

전 대통령 박근혜를 수식하는 단어 `자연인'은 공인의 위치에서 멀어진 상황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자연의 품에 숨어 사는 처지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장 자크 루소가 <에밀>을 통해 대비시킨 `자연인'과 `사회인'의 상관관계는 의미심장한데, 자연인으로서의 그녀에게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적 인간으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탄핵 후에도 고수하고 있는 올림머리의 지속 가능성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내일 일을 미리 전망할 수 있는 나라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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