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에 대하여
비움에 대하여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7.03.20 1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봄은 숫자로 오는 게 아니라 혀끝으로부터 온다고 했던가. 이맘때면 입맛까지 간사해진다. 김치 맛이 씁쓰레하고 혀끝에서 먼저 기억하고 밀어낸다. 지금은 봄, 3월이다. 점심엔 무엇으로 입맛을 돋울까? 향긋한 봄나물을 무쳐낼까, 얼큰한 찌개를 끓여볼까 고민하다 냉동실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검정 봉지 대여섯 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더니 내 발등을 찍었다. 순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아팠다. 주섬주섬 펼쳐보니 얼린 오징어며 돼지고기, 청국장, 명절에 먹다 남은 떡과 전, 그리고 자반고등어 한손이 얌전히 누워 있다. 그러고 보니 외출했다 충동적으로 사들인 것, 버리기 아까워서, 가끔 모이는 가족들 생각에 비우기보다는 채우기 급급했다. 두 식구에 얼마나 먹겠다고 욕심을 부린 걸까. 나의 어리석음에 일침을 놓은 것이다. 이따금 냉장고가 굉음을 낸 것은 제 몸이 버겁다고 우는 소리였으리. 빼곡하게 쌓인 고것들이 붐비는 지하철 속의 고단한 도시 사람들을 닮았다. 답답한 마음에 청소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냉장고 속을 비우니 한결 깔끔해졌다. 냉장고를 비우면서 문득 친정 식구들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겨진 아파트와 사업체를 소유하기 위해 오남매의 날 선 분쟁이 이어졌었다. 나는 그것이 마뜩찮았다. 하여 누구에게도, 어느 쪽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택했다. 장남인 아들은 모두가 자신의 재산인 양 으름장을 놓았고, 평소 아버지와 왕래가 잦았다는 이유로 나를 경계했다. 언니 또한 상대에 대한 불만을 내게 토로했고,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라도 함께 하길 원했지만 난 도리질 했다. 생전에 아버지의 고단했던 삶을 알기에 나 스스로 재산상속 포기선언을 했다. 내 욕심 하나 비우면 형제간의 우애가 더 돈독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오히려 중간에서 저들의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 내가 부자도 선해서도 아니다. 다만 내 딸들에게 부끄러운 어미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 지금까지 조촐한 삶이었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오빠의 부탁으로 상속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던 날은 가슴에 비가 내렸다. 자식들에게 평등하게 나눠지길 바라던 아버지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장남에게 넘겨졌다. 헤어지며 돌아서는 오빠는 말없이 땅만 내려다보고 나는 망연히 하늘만 올려다봤다. 고난도의 수학문제를 푼 듯 홀가분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전날 밤 내 머릿속은 산란한 마음이 저울질했었다. 흔들렸다. 누구나 물질의 욕심 앞에선 눈이 멀어지는가 보다.

냉장고를 비우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청소해서 말끔히 비울 수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맑고 향기로울까?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클수록 서로에게 받는 상처의 비중은 천 배의 아픔이 된다. 비운다는 것은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몫을 덜어내는 일이다. 친구들이 제 몫도 못 찾는 바보라 부르지만 지금은 비운만큼 고요하다. 마음의 무게도 봄옷을 걸친 듯 가볍다. `비우는 것은 내려놓음이다. 비움은 용서이고, 자비이다.'라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느새 이순을 넘어왔다. 많은 것 소유하지 않았으니 때론 불편할 때도 있지만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있지 않은가. 욕심을 비우고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마음은 궁핍하지 않을 것 같다. 행복한 삶은 물질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적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