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퇴거와 행복추구권
웃는 퇴거와 행복추구권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7.03.1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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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자연인 그녀는 웃었다. `상식과 보통'의 국민이 보기엔 기가 막힌 일이지만 청와대에서 퇴거해 삼성동 사저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웃었다.

내가 첫 문장의 주격조사를 그녀`가'로 적지 않고 그녀`는'을 사용했다는 점을 독자들은 특히 주목하길 바란다.

주어와 서술어를 기본으로 이루어지는 우리 문장에서 주격조사 `은/는/이/가'의 역할과 상징은 중요하다. `그녀(가) 웃었다'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사실적 진술에 가깝다. 그러나 `그녀(는) 웃었다'의 경우, 같은 종류의 다른 대상을 염두에 두면서 그 중 특정한 하나의 대상을 언급할 때 적합하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을 두고 문법 공부를 하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자연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웃는 모습이 하도 소름끼치는 일이어서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다. 단 하나의 글자를 사용하더라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상식과 보통'의 국민에게 `진실을 밝히겠다'는 의지와 `웃는 퇴거'는 차라리 치를 떠는 두려움이 될 수 있다.

대신 전해진 말과, 담대하고 의연한 듯 손 흔들고 웃는 모습은 헌법에 대한 노골적 저항과 극단의 분열을 조장하는 고도의 연출된 상징적 이미지임을 우리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결국 20차례나 거듭된 촛불의 외침에도, 대통령 탄핵만이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결연한 의지의 필요성을 확인시켜 줬을 뿐이다.

지난주 <수요단상>에서의 “더불어 극단의 편파와 왜곡, 그리고 식민적 근성을 숨기지 않았던 몸부림에도 용서와 관용이 필요할 것이다.”라고 쓴 내용을 취소한다. `이제는 화해해야 할 때'라거나 `용서와 관용'혹은 `정치적 보복 자제'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국정운영 과정에서의 정치적 과오나 정쟁으로 인한 탄핵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퇴임하면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남긴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法之爲道前苦而長利)'는 <한비자>의 한 소절대로 권력형 범죄에 대한 길고 긴 관용과, 고비만 넘기면 속절없이 되풀이되는 양비론, 혹은 그들끼리의 수상한 상부상조(?)의 고리를 확실하게 끊어야 할 때가 됐다. 그래야 `웃는 그녀'가 바라는 `진실을 밝히는'횃불이 될 수 있다.

`승복'이거나 `분열과 갈등의 중단'등 그럴싸한 메시지 없이 일요일 밤 기습적으로 퇴거한 그녀로 인해 나는 <행복>을 또다시 유린당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닌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요일 저녁, 복잡했던 머릿속을 텅 비우고, 희희낙락 예능프로그램에 빠져 달콤한 휴식과 행복을 만끽하던 시간을 그녀는 빼앗아 갔다. 공중파 3사를 비롯해 거의 모든 TV를 도배한 파면에 따른 퇴거 속보로 인해 채널 선택권은 사라졌고, 다시 뻔뻔하게 조작되는 이미지 메이킹에 치를 떨어야 하는 일은 또 하나의 불행이다.

불법 부당함을 충언하지 못하고, 동정심을 자극하는 전언과 더불어 관용을 말하며 위태로움을 견뎌내려는 무리에게 더이상 너그러울 일은 적어도 나에겐 없을 것이다.

웃는 그녀의 얼굴과 부역의 무리, 무모한 지지자들의 모습을 보며, 하물며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흘러간 노래를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는 내 모습도 너무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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