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에게
봄이에게
  • 박윤미<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7.03.14 1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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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 박윤미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 가슴이 찡했다. 아이들의 사각거리는 펜 끝에서부터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교실 가득 퍼져 나갔다. 고3 첫 모의고사에 대한 긴장감을 완전히 풀 수는 없었지만 우리 모두 그 어느 때보다 가슴 뭉클하고 미안하기까지 한 말이었다. 박치성 시인의 `봄이에게'에서 온 구절이었다.

민들레가 어디서든 잘 자랄 수 있는 건/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바람에/ 기꺼이 몸을 실을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지.//어디서든 예쁜 민들레를 피워낼 수 있는 건/ 좋은 땅에 닿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고/ 바람에서의 여행도 즐길 수 있는/ 긍정을 가졌기 때문일 거야//아직 작은 씨앗이기에/ 그리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

올해는 3학년을 맡게 되었다. 교사로서 경력이 많아지면 능숙해질 줄 알았는데 매년 일은 새롭고 몸과 정신은 낡아진다. 한의원에 가서 보약부터 챙겼다.

상담을 시작하였다. 학생이 작성한 기초 조사서를 바탕으로 가정환경과 진로 희망을 파악하고, 생활기록부를 분석하여 1,2학년 동안의 학교생활과 성적 추이를 살핀다. 앞으로 열심히 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명지 차례가 되었는데 기초 조사서에 빈칸이 상당하다. 지난해 우리 반 부실장이었으므로 내가 이미 자신을 잘 알고 있을 거란 뜻인 걸 모를 리 없지만, 우리가 처음 만난 듯이 작성해야 한다며 깐깐하게 잔소리를 하고 함께 생활기록부를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2년 개근은 기본적인 건강과 성실성을 의미한다. 1학년 때에 동아리 활동 발표대회와 UCC 제작 경연 대회에서 수상한 것이 있는데 2학년 때는 의외로 별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아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1학년 때 받은 상 두 개는 사실 여러 명이 도와서 했으므로 자신이 한 건 별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2학년 때에 여러 대회에 도전했지만 상을 못 받았다고 했다. 그랬었구나.

나는 명지를 다시 되짚어보았다. 명지는 우리 반에서 본받아야 할 점이 있는 친구, 칭찬해줘야 할 친구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아이 중 하나였다. 어려운 친구를 선뜻 도와주고 선생님들께 아이들의 의견을 잘 대변해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독서활동과 스스로 시행한 진로활동을 써내라고 하고 여러 번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제출하지 않아서 나는 아이의 성실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했었다. 명지는 칭찬 중에 자신의 몫만을 받는다. 청소를 잘했다고 칭찬하면 다른 친구가 얼마나 했고 자신은 이만큼을 했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리고 내세울 만하지 않다 생각하면 먼저 자랑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성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더 많이 살피고 더 꼼꼼히 해낼 수 있도록 짚어주지 않았던 것이 미안했다.

지금의 생활기록부는 추천서의 수준으로 작성한다. 매년 학기말에 아이를 잘 파악하였는지, 내용에 거짓은 없는지, 담임으로서 기꺼이 알고 있어야 할 것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고심한다. 명지에게 말했다. 지나간 시간에 아쉬움은 있지만 서로 더 잘 알게 되는 시간을 벌었으니 우리에게 한 해가 더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다만 눈으로 보고 들어야만 아는 나를 위해 조금 더 많이 얘기해 주면 좋겠다고.

봄이에게 가을이가 말한다. 올 한해 초조하고 불안하고 힘들더라도 굳건히 이겨내길 바란다. 세상의 모든 씨앗이 각자의 추위와 어둠을 견뎌내고 각자의 건강한 빛을 발하는 갖가지 꽃으로 핀단다. 무엇보다 누군가가 몰라준다 해도 너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단다. 너희는 모두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거야. 자신감을 갖고 믿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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