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태평천하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7.03.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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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저만치서 후배가 손을 흔든다. 바람이 차다. 지퍼를 목덜미 끝까지 올려보지만 코가 시리다.

도서관까지 걷는 길 스며든 봄빛을 읽는다. 앞서 가는 아가씨의 스커트 찰랑거림에서 풀려나오는 경쾌한 리듬, 나무마다 통통 불은 꽃눈 잎눈의 팽팽한 긴장, 담벼락을 따라 올망졸망 모인 개불알풀 보랏빛수다.

네거리에 서서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빵집 문이 활짝 열리더니 쓱싹쓱싹 빗질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곤 문 앞 보도블록 위로 물을 쏟는다. 겨울 때가 말끔하게 씻겨 내려가고 햇살이 반짝거린다. 초록 불. 같은 보폭으로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책 벗이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민 낯이 더 익숙한 그녀의 입술에 살짝 칠해진 붉은 루즈. 예쁘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오늘은 모임에 새 식구들이 오는 날. 어떤 벗들이 삼월을 열어줄까 기대감과 호기심이 발걸음을 재촉했는지 천천히 걸었는데도 시간은 여유롭다.

오르막길 입구. 문득 오래된 구옥이 눈에 들어온다. 기와는 빛이 바랜 채 허물어지는 중인데다 문짝이 떨어져 나가 어지러운 집안이 들여다보인다.

비스듬히 볕이 찾아든 자리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 한 짝. 쓸쓸하다. 누군가 깃들였던 자리. 삶이 남긴 흔적을 마주할 때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집은 오랜 기억을 품은 채 천천히 스러져 갈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았을까.

빈집의 풍경 위로 토론을 위해 읽은 소설 속 인물들이 겹쳐진다. 4·19혁명부터 부마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살아내며 국가에 의해 희생된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 빈집의 푸른 슬리퍼처럼 버려지고 잊혀진 그들의 아픔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던 시간. 밀집된 주택들 사이 골목길을 걷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빈집의 쇠락처럼 사과도 위로도 받지 못한 채 그늘 속에서 소리 없이 지워진 삶들이 얼마나 많을까. 시간은 흘렀으나 여전히 바뀌지 않는 우리의 현실.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가는데 정권을 가진 그들은 무엇을 꿈꾸는 것일까.

어디에도 깊이 발을 내리지 못한 나는 어지러운 시국에도 여전히 평범하고 평온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밥을 짓고 봄나물을 무치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다. <태평천하>의 윤직원처럼 밖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는 사람처럼 내 주변의 안위를 걱정하며 어제 같은 오늘을 산다. 그것이 서러워 못 견디게 아프다.

생각이 한 곳으로 쏠리며 마음이 낮게 가라앉는다. 도서관도 봄 단장을 했는지 산뜻하다. 강의실 문을 여니 따스한 인사말들이 건너온다. 물 끓는 소리가 마음을 안온하게 데워준다. 유일하게 믹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회. 종이컵에 타 주는 믹스커피 달달함이 위안이 된다.

새 식구가 여섯이나 되어 금세 도란도란 두런두런 이야기로 가득하다. 어떤 결과든 거기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설사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지금처럼 꿋꿋하게 살아내면 되는 거라던 선배의 말이 위로처럼 남았다. 어두운 밤에도 지켜보는 눈이 있듯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려니.

서러워하지 않으리라. 토론이 끝날 즈음 살풋 깃털 같은 눈발이 몇 송이 날린다. 하늘은 끝없이 깊고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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