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고등학교와 보재 이상설
서전고등학교와 보재 이상설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3.0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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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지난 2일 진천 혁신도시에 서전고등학교가 개교했다. 교명이 `서전'인 이유가 있다. 학교가 세워진 혁신도시 인근에 이상설 선생의 생가가 있고, 선생이 생전에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에서 교명이 유래한다. 이상설 선생의 서거가 1917년이므로 서거 100주년이 바로 올해다. 서거 100주년에 즈음해 선생의 정신과 뜻을 계승하여 나라를 위하고 인류를 향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인재를 양성하는 의미 있는 학교가 세워지는 것이다.

독립 운동가로 알려진 선생은 27세의 나이로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이 된 입지적 인물이다. 젊어서 이미 율곡 이이를 능가할 대 학자로 명망을 얻은 인물이었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학으로 근대적 학문인 정치, 법률, 경제, 사회, 수학, 과학, 철학, 종교 분야까지 독학으로 섭렵한 천재였다. 한국 최초로 근대적인 수학 교과서를 저술하는 등 그를 가리켜 `신구학문을 겸비한 한국 제일의 학자'이며, 안중근 의사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상설을 꼽았다.

`을사늑약'체결 반대 상소 운동과 민영환의 순절한 소식에 종로 거리에 나가 운집한 시민에게 국권회복운동 총궐기 연설 후 자결을 시도했는데, 피투성이가 된 선생을 시민이 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06년 북간도의 용정으로 망명해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해외 교육구국 민족학교였다. 선생은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신학문인 국제법과 수학, 정치학 등을 직접 교육하며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했다.

1907년에는 이준, 이위종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수석 특사로 참가해 일제에 빼앗긴 대한제국의 외교권 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선생이 참석도 하지 않은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내렸다.

1910년 6월 연해주에서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하고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조국을 병탄하자 교포들을 규합해 성명회를 조직했다. 일제는 1910년 9월 11일에 러시아당국과 교섭을 벌여 이상설을 비롯해서 이범윤 등 성명회 간부 수십명을 체포하였다. 이상설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니콜리스크로 추방됐다가 이듬해에야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 1911년 12월에 이곳에서 권업회를 조직해 회장에 취임했고, 그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행해 교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교민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16년 중병에 걸린 선생은 니콜리스크에서 투병을 했으나 효과가 없어 48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그는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상설의 임종을 지켰던 동지들은 유언대로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이상설의 유해를 화장했으며, 문고와 유품도 함께 거두어 불살라 그 재를 강에 날렸다고 한다. 1996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신 선생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됐다. 80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 진천 땅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이제 선생이 가신지 100년이 되는 2017년 선생의 뜻을 기리는 서전고가 생겨 너무나 자랑스럽다. 이 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개인의 성공과 성취만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생의 정신을 계승해 나라를 위하고 인류를 위한 큰 인물들의 못자리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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