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윤봉길, 안중근 …
사드, 윤봉길, 안중근 …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7.03.06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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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이재경 국장(천안)

두고두고 봐도 그 기개가 씩씩하고 웅렬하다. 그러면서도 평온해 보인다. 24세 청년의 맑은 눈에는 그 어떠한 두려움이 없다. 지그시 다문 입술에는 기필코 거사를 해내겠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1932년 4월 27일 중국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1908~1932)가 훙커우 공원 거사 이틀 전에 찍은 사진 속의 모습. 오른손엔 권총을, 왼손엔 폭탄을 들고 상의 가슴팍에는 직접 일제의 심장부를 응징하겠다는 선서문까지 내걸고 있다. 이후 현장에서 체포돼 순국함으로써 절명사가 된 이 선서문은 비장하기 그지없다.

“나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길 맹서하나이다 ”

이틀 후인 4월 29일 그는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제 전승 기념행사가 열리는 훙커우 공원에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행사장에 수통형 폭탄을 정확하게 투척, 상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와 거류민단장 사다쓰구를 죽이고 노무라 제3함대 사령관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사건의 파문은 엄청났다. 외신이 세계에 타전하면서 빅뉴스로 다뤄졌다. 차이나리뷰 등 중국의 신문은 물론, 런던타임즈, 뉴욕이브닝포스트 등이 사건의 파장과 일본, 중국의 반응을 전했다.

그중 압권은 중국 정부를 이끌던 당시 장개석 주석이 한 말이다. 그는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한 일을 (식민지)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윤봉길 의사의 쾌거에 찬사를 보냈다. 이때부터 한국에 대한 중국의 대접도 달라졌다. 일제의 계략에 의해 벌어진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의 독립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중국은 국민당 정부가 직접 나서서 임시정부를 지원해 충칭에 새 정부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줬다.

중국도 윤봉길 의거를 스스로 민족 자각의 계기로 삼아 일본의 침략에 적극 대처하기 시작했다. 우리 한인애국단 같은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해 일본군은 물론 친일파에 대한 척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앞선 23년 전에도 중국 대륙을 들썩이게 한 한국인의 쾌거가 있었다.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대륙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1879~1910)다.

의거 후 중국의 지성들은 안중근 의사를 위대한 사상가와 혁명가로 치켜세웠다. 당시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였던 진독수는 신청년 잡지 창간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와 타고르가 되기보다는 콜럼버스와 안중근이 되기를 원한다.”

혁명의 아버지로 추앙받은 쑨원도 이런 글을 남겼다. “공(功)은 삼한을 덥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드리우리.”

이런 한시(漢詩)도 전해진다. “조선에 군자가 많다 해도 3천만인데, 봄날 상해 황포 강변에서 거대한 폭탄으로 적을 섬멸하니, 우리 4억 중국인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훙커우 공원 의거가 발발한 지 85년이 지난 지금 중국과 한국이 사드 배치를 놓고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다. 수교 이래 최악의 상황이다.

자국민의 한국 관광 금지와 롯데마트의 영업정지 조치, 한국 수입품 통관 거부 등 양국간 교역의 단절도 불사할 듯 치졸하고 거침이 없다. 1세기 전 중국 땅을 울렸던 우리 청년 지사들을 칭송했던 대국다운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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