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전투의 명장이 잠든 곳 충민사 계단을 오르며 (1)
진주성 전투의 명장이 잠든 곳 충민사 계단을 오르며 (1)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승인 2017.03.05 1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괴산읍에서 충주 방향으로 15분쯤 달리면 배나무여울(梨灘)이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을 지나 다음 마을은 구무정인데 이 마을에서 좌측으로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 아래 단아하게 조경을 이룬 곳 충민사를 만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삼 대첩을 이룬 곳 중의 하나로 진주성을 굳건히 지켰던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사우(祠宇)가 있는 곳이다.

충무교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노라면 눈 아래 깊고 푸른 괴강이 흐른다.

때맞추어 마중 나온 강바람은 도시에서 달려온 사람들의 땀을 식혀주며 품었던 욕심을 스르르 내려놓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마음을 맡긴 채 어느덧 홍살문 앞을 지난다.

이 다리를 놓은 지는 30여 년 정도이나 그 이전에는 조그만 배를 타고 건넜다는 추억이 담긴 곳이다.

관리소 주변의 푸른 잔디를 지나 열두 폭 비단 치마를 두른 듯 넓게 펼쳐진 화강암의 부드러운 바위를 보는 순간 감탄을 금치 못한다.

더더욱 오뉴월의 충민사 뜰은 비 온 뒤 새싹의 곱고 영롱함이 신비로움을 더해 생기가 절로 넘쳐 난다. 자그마하나 단청으로 곱게 차리고 기다리는 안내문을 따라가면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로 행정 주소는 괴산읍 능촌리이다.

이곳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과 그 당시 강원도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부인, 아들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여 원주의 충렬사에 배향된 김시민 장군의 숙부이신 문숙공 김제갑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 하는 사당이다.

장군은 타고난 어진 성품으로 매사에 솔선수범하며 군림하지 않고 덕망과 위엄을 갖추고 관원들을 단속하여 백성에게 존경받고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넘쳐 흘렀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장군은 사졸과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같이 하기를 맹세하였다고 전한다.

왼편으로 오르는 20여 개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효충문(效忠門)이 나오고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김시민 장군 유적 정화 기념비'가 흰 대리석에 크게 쓰여 있다.

뒤편에 월탄 박종화 선생님께서 쓰신 장군의 전적과 우리 민족이 가져야 할 자세와 대첩을 이루신 과정을 소상히 기록하고 안타깝게 순절하신 일을 절절한 마음으로 음각(陰刻)해 두었다.

많은 탐방객이 이 글을 읽고 숙연해진 마음으로 돌아서며 장군의 충절 정신을 이어가곤 한다. 왼편에는 장군과 숙부 문숙공(文肅公)의 후손들이 두 분께 세워 드린 유적비가 귀부(趺) 위에 세워져 있다.

몇 해 전 괴산 문화원에서 발간한 묘비(墓碑), 묘갈(墓碣) 번역본의 내용을 보면 장군이 진주 목사로 갔을 때 그곳 지방민들이 “12년 전에도 장군의 삼촌께서 목사로 오셔서 어진 정치를 펴셨는데 그 삼촌에 그 조카가 아니겠느냐?”하며 굳이 시키지 않아도 솔선수범하는 장군을 따라 주어 군과 민이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내용이 있다.

다시 위쪽으로 오르면 선무문(宣武門) 이라고 쓴 편액이 걸린 솟을삼문의 건축 양식을 만난다.

양옆으로 수십 년 된 적송 사이를 지나면 장군의 영정이 정면에서 여행객을 내려다보고 있다. 편액에는 충민사(忠愍祠) 라고 씌어 있고 가파른 열두 개의 계단을 오른 후 누구라도 서슴없이 영정 앞에 가서 분향과 묵념을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