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과 아우내봉화제
유관순과 아우내봉화제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7.02.2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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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 이재경 국장(천안)

아직도 많은 사람이 유관순 열사(1902~1920)가 1919년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3.1 만세 운동 때 일제에 붙잡혀 순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유 열사는 꼭 한 달 후인 4월 1일 고향인 충남 천안에 내려와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바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다.

열사는 앞서 한 달 전 서울에서 3.1 만세 운동 때 이미 한 차례 체포됐었다. 3월 1일 이화학당에서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 서명학 등과 5인 결사대를 결성해 소복을 입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참여했다. 나흘 후인 3월 5일에는 학생연합 시위에 참여, 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붙잡혔다 석방됐다.

이때 부터가 시작이었다. 전국에서 학생들의 만세 운동이 격렬해지자 일제가 3월 10일을 기해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에 돌아갈 수 없게 된 열사는 함께 학교에 다니던 사촌인 유예도와 독립선언문을 품고 고향으로 향했다. 3월 13일이었다.

고향에 내려온 열사는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숨겨 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서울에서의 3.1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다. 마을 어른들은 곧바로 이에 호응, 장날인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다. 이게 바로 열사와 함께 홍일선, 김교선, 조인원 등이 주도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다.

이때 열사는 만세 시위 준비와 연락 업무를 맡아 활동했다. 거사일 하루 전에는 동료와 함께 자정에 매봉산 등 장터 주변 20여개 봉우리에 봉화를 올려 충북 진천, 천안 수신면 등 주변의 호응을 이끌었다.

다음날인 1일 장터에서 시위를 주동한 열사는 이때 부모(유중권, 이소제)를 모두 일제의 총칼에 잃고 자신도 체포돼 투옥됐다. 이날 시위는 군중 4000여명이 합세한 대규모 시위로 19명이 숨지고 1백여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거나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열사의 항쟁은 옥중에서도 계속됐다. 두 달여 후 2심인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열사는 3.1운동 1주기를 맞아 형무소에서 3000여명의 수감자와 옥중 만세 운동을 벌이다 또다시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이때 얻은 병으로 결국 그해 9월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마지막 유언은 비장하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귀와 코가 잘리더라도,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마지막 슬픔입니다.'

28일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장터 일원에서 유 열사가 목숨을 바쳐 주도했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한 아우내봉화제가 열린다.

구제역과 AI 발생 여파로 3년간 중단됐다가 4년 만에 다시 열리는 행사다.

이날 행사에는 200여명의 학생들도 참여해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당시 만세 운동을 재현한다. 98년 전, 1919년에 유관순 열사가 흔들었던 태극기의 정신이 오롯이 우리 학생들에게만큼은 살아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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