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읽는 시
겨울에 읽는 시
  • 박윤미<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7.02.2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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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박윤미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딸아이의 책상 위에서 익숙한 시구가 적힌 작은 종이쪽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한용운의 시집을 읽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랜 시간 깊이 잠들어 있던 내 속의 여고생이 눈을 떴다. 학교 도서관에서 시집을 찾아냈다. 마음 바닥 한구석에 질서없이 쌓여 잠자던 시어들이 깨어나 와글거렸다.

나는 서정 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 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한용운, 예술가 중에서)

담백하고 애잔하다. 스스로 서정 시인이 될 소질이 없다고 하는 시인은 누구보다 절절하게 사랑의 그리움과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다. 추상 속의 애증보다 현실 속의 사랑이길 원한다. 보이는 만큼만 그대로 쓰고 싶다는 마음은 넘치는 사랑의 크기이고 애증의 깊이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보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고, 보는 것도 괴로움이다. 한때 나도 그랬었다.

그녀는 밤새 운다. 난 그걸 안다. 그녀는 그에게 무엇인가라도 연관되는 걸 찾아보려 하지만 막상 그의 앞에서는 그것이 나타날까 봐 너무 조심한 나머지, 그로서는 아주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아침이면 그녀는 활짝 웃으며 거리를 나선다. 사람을 만난다. 그도 만난다. 어젯밤의 눈물은 흔적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그를 만난다. 어느 날 그는 자기의 큰 키를 이용하여 그녀를 고개 숙이고 바로 아래로 바라본다. 그녀는 머리를 들어 그를 쳐다보고. 애써 그런 포즈를 취한 것이 아니라 정말 우연이었다. 그는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그는`대화'가 아닌 화제로 돌아가 돌연 `너 나 좋아하지?'한다. 그녀는 내심 놀랐지만, 그녀의 마음을 들켜버린 것에 대해 놀라긴 했지만, 굳이 피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화의 연결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웃었다.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그런 말을 한 그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 순간은 지나가 버린다.(1990.12.28. 내 일기에서 그대로 옮김)

그 애를 볼 수 없는 것도 고통스러웠고, 보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만나는 고통을 고대했다. 어느 순간 우연한 시선의 충돌,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영원 같은 찰나, 긴 아픔의 순간, 빛의 파편. 나는 천진한 표정으로 그 아이를 바로 바라보았다. 아무 의미 없는, 지나치는 우연한 시선임을 강조하느라 애쓰면서. 그리고 들키지 않았다. 짝사랑은 겹겹이 싸서 아무것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만의 비밀로 남았다. `소설로 위장했던'일기는 부끄러우면서도 내 삶에서 가장 싱그러웠던 젊음과 사랑이고 다시 오지 않을 시간임을 알기에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답게 생각된다.

당신이 계실 때에 알뜰한 사랑을 못하였습니다. 사랑보다 믿음이 많고, 즐거움보다 조심이 더하였습니다. (한용운, 후회 중에서)

돌아보면 사랑에 참 인색했다. 시인의 삶을 보았을 때 `당신'이란 단순히 연인이 아닐 것이다. 사람과 일과 주위의 모든 것들과 순간들, 내 삶에서의 수많은 당신들을 떠올려 본다.

겨울 동안 학교에서는 아이들과 동료를 떠나보내고 새로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봄이 되면 매일 새로운 일과 새로운 순간들이 펼쳐질 것이다. 올해는 조금 더 `알뜰한 사랑'을 하는 용기를 갖기를 내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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