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청주엔 보리생명미술관이 없을까
왜 청주엔 보리생명미술관이 없을까
  • 임성재<칼럼니스트>
  • 승인 2017.02.2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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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지난주 천안에 있는 백석대학교 졸업식에 다녀왔다. 송계 박영대 화백이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였다. 대강당은 졸업생과 학부모들로 가득 찼고, 단상 위에는 형형색색의 가운을 입은 50여명의 보직교수들이 앉았다. 그리고 단상 중앙에는 박영대 화백 부부를 위한 자리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졸업식은 장엄하고 엄숙했으며 축하와 감사의 마음이 넘쳐났다. 그 자리에서 박영대 화백은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점심식사 후에는 박영대 화백의 작품 120여점을 기증받아 설립한 `보리생명미술관' 개관식이 열렸다. 개관식 행사는 규모가 크고 화려하진 않았지만 진정으로 작가를 예우하는 품위 있는 진행으로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자리에서 박영대 화백은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고 영광스럽다'면서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고 미술관을 설립해준 학교에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관념과 관습을 뛰어넘기 위한 새에게는 강한 날개가 필요하다'는 좌우명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작업에 몰두한다고 연설해 참석자들로부터 열띤 박수를 받았다.

보리생명미술관에 들어서면 전면에 푸른 보리밭(靑麥)과 누렇게 익은 보리밭(黃麥)을 그린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그리고 좌우에 위치한 전시실에는 박영대 화백의 필생의 역작 수십 점이 전시되어 있다. 휘황한 조명아래 넓은 벽면을 차지하고 걸려있는 작품들은 더욱 돋보였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작품도 어디에 걸려 있느냐에 따라 그 품격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백석대학교의 박영대 화백에 대한 예우는 나의 경험과 상상을 초월했다. 명예박사학위를 주고 미술관을 만들어주는 시혜자의 입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작가를 존중하고 작품을 대하는 진정성이 돋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박영대 화백이 앞으로 작업에만 매진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주었다. 대학의 종신 석좌교수로 모셔서 연구비를 지급하기로 했고, 연구실은 500호 화폭을 서너 개 펼쳐놓아도 여유가 있을 만큼 큰 방을 마련해주었다.

박영대 화백이 작가로 살아온 길은 험난했다. 청주 청석학원에서의 미술교사직을 내려놓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인사동에 작업실을 얻어 전업 작가의 길을 걷던 때부터 칠순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그에게 여유를 부릴만한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죽을힘을 다해 작품을 그리는 것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남들은 삶에 안주하고 인생의 여유를 즐길 나이에도 그는 치열하게 작품에 매달렸다.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보리가 이제는 우리민족의 정서와 생명을 상징하는 추상이 되었고, 화폭은 묵과 유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로 변해갔다. 그의 몸은 나이를 먹어갔으나 그의 작품은 점점 더 완숙해지면서 젊어졌다.

그런 그의 작품을 알아봐준 백석대학교가 고마웠다. 미술관을 돌아보고 청주로 돌아오는 내내 벅찬 감격이 가슴속을 고동쳤다. 그리고 아쉬움도 밀려왔다. 왜 청주에선, 충북에선 보리생명미술관에 대한 생각이 없었을까하고. 2015년 「동아시아 문화도시 청주」의 개막식 주제는 `보릿고개를 넘어 생명문화도시로'였다. 박영대 화백의 보리작품이 주 테마였다. 그런데 세계에 홍보하는 문화도시 청주의 상징물처럼 여겨졌던 그의 작품들을 모은 미술관이 `보리생명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천안의 한 대학 내에 설립됐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지역문화예술정책의 수치다.

얼마 전 충청대학교 박물관이 폐관되었지만 청주시나 충북도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살았던 조상의 숨결과 지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유물들이 어디로 옮겨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소관업무가 아니라며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지자체들의 문화행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지자체의 존재의 목적은 지역을 경제적으로 발전시켜 주민들의 소득을 높이는 것도 있겠지만 지역의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을 잘 보전하여 후세에게 물려주는 것도 경제정책 못지않게 중요하다.

`무예 마스터십'이니 `젓가락 페스티벌'이니 하는 생소하고 낯선 것들을 억지로 우리 것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래도록 가꾸고 키워왔던 것들을 어떻게 잘 지키고 보존하여 빛나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지역 문화이고 지역의 정체성이다. 사라진 충청대학교 박물관과 보리생명미술관이 천안에 세워진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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