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서른
두 번째 서른
  • 김용례<수필가>
  • 승인 2017.02.20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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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용례

새해 첫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뜬 딸내미가 “엄마 나 이제 서른이네. 엄마는?” 하더니 “우리 여행갈까요” 느닷없이 여행을 가잖다. 자식이면서 친구고 때로는 보호자 같은 서른 살의 딸, 시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엄마와 부산 해운대로 향했다.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사이에서 우리도 불쑥 떠나온 여행이 마냥 즐거웠다. 새로 입사한 직장이 마음에 들어 일이 재미있다는 아이의 얼굴이 좋아 보인다. 서른 살의 젊음, 풋풋한 자신감이 부럽다.

나는 서른 살 때 한 남자의 삶에 이끌려가고 있었다. 그 남자의 성공이 내 인생의 성공으로 믿었다. 그런데 남자의 행보가 빨라질수록 우울했고 쓸쓸했다. 그 남자의 아내일 뿐 내 자존감이 없었다.

그즈음 이 아이를 낳았다. 딸을 낳았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슬펐었다. 여자의 삶을 생각했던 것이다. 서른 중반까지 남매를 키우며 크게 부족할 것도 호화로울 것도 없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갔다.

평온하던 삶에 바람이 불었다. 남편이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었다. 그 후의 삶은 거친 바다였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쳤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졌다. 걷고 또 걸어도 제자리 걷기만 하듯 답답했다. 인생에 대한 회의와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독을 품고 살았다. 곧 몰아 칠 폭풍전야 같았다. 그때 유일하게 허기를 채웠던 것이 책을 읽는 일이었다. 마흔 살 넘어 가까이 지내던 지인의 권유로 충주사과 백일장에 참가했다. 그 후 글을 쓰면서 차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오랜 시간 파도에 끄들리며 살았다. 뒤돌아보니 파도 속에서도 할 수 있었던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할 수 없는 핑곗거리만 나열하며 입을 내밀고 살았다. 어리석었던 엄마의 부끄러운 고백을 딸에게 했다. 생각해보면 저 바다에서의 삶이 나를 인간답게 만든 시간이다. 평온한 바다는 절대로 노련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 삶의 행복과 불행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온실속의 삶은 녹음된 파도소리를 듣는 것처럼 지루할 것 같다. 매일 똑같은 반찬으로 차리는 밥상은 식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프다고 누구 때문에 핑곗꺼리를 끌어다대며 머뭇거리다 흘려보낸 시간이 뼈아프게 아깝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이다. 공자가 60세가 되어서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서 온 말이다. 내게 붙은 육십이란 숫자가 부끄럽다. 봄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꽃을 찾고, 차 한 잔을 마셔도 분위기 좋은 곳을 찾는 철없는 여자다. 아직 시고 떪은 맛을 우려내야할 설익은 풋것 인데 이순이란다. 화려한 인생을 꿈꾼 적 없다. 다만 좋은 삶을 살고 싶었다. 좋은 삶은 손끝에서 나오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 만드는 것임을 안다. 이제 서른의 열정은 없다. 두 번째 서른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온기를 지녀야 함을 안다. 뜨거움보다는 따뜻함이 좋은 것을 서른 살은 모르리라. 바닷가를 걸으며 서른의 여자답게, 두 번째 서른답게 우리 멋지게 출발 하자며 딸이 손을 꼭 잡는다.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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