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성재<칼럼니스트>
  • 승인 2017.02.1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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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우리는 많은 꿈을 꾼다. 그중에는 이룬 꿈도 있지만, 평생 이루지 못하고 아쉬움으로 남는 꿈도 있다. 그런데 꿈을 이루고 나면 성취의 기쁨은 잠깐이고 더 큰 욕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루어진 꿈은 이미 꿈이 아니다. 욕망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루지 못한 꿈은 그 꿈을 향한 간절함과 애틋함 때문에 삶에 희망이 되기도 한다.

차가운 공기를 뚫고 한줄기 봄기운이 돋아나던 어느 날 오후, 심장을 흔드는 고동소리를 남기고 모터사이클 한 대가 사라져갔다. 둥둥거리는 엔진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이루지 못한 내 꿈이 살아났다.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타는 꿈이다. 검정 가죽옷을 입고, 긴 부츠를 신고, 나치가 쓰던 모양의 알게마인 헬멧을 쓰고, 할리에 앉아 지평선을 향해 길게 뻗은 도로를 달리는 꿈.

내가 할리데이비슨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흑우(黑雨) 김대환 선생님을 만나고 부터다. 그는 우리나라 1세대 드러머로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미세조각에도 조예가 깊어 좁쌀 한 알에 반야심경 283자를 모두 새겨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선생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한군데 더 갈 곳이 있다며 우리 일행을 데려간 곳이 오래된 오토바이 가게였다. 거기에서 할리데이비슨을 처음 만났다. 묵직한 그의 몸체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있었고, 시동을 켜자 터져 나오며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엔진소리는 기품이 있었다.

회사에 돌아와 VCR에 담긴 선생의 드럼 연주회 실황을 보다가 큰 충격에 빠졌다. 무대 위에서 할리가 시동이 켜진 채 둥둥 거리는 엔진소리를 내뿜었고, 선생은 양손 손가락에 8개의 스틱을 끼고 엔진 소리를 박자삼아 신들린 듯 드럼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무대의 불이 모두 꺼지자 야광 처리된 선생의 스틱만이 암흑의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그런데 그 영상을 보면서 선생의 드럼소리에 꽂힌 것이 아니라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할리데이비슨의 엔진소리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할리데이비슨은 내 꿈이 되었다. 아마 김대환 선생의 드럼 치는 소리에 빠졌다면 지금쯤 멋진 드러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나 모터사이클의 엔진 소리에 빠져버려 할리의 꿈을 품고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방송국 초년병 시절에는 오토바이를 타기도 했었다. 물론 할리는 아니었고 취재를 다니는 교통비를 절감하기 위해 구입한 80cc의 작은 오토바이였다. 기어가 없어 악세레이터를 당기기만 하면 나가는 모델이었는데 자전거만 탈 줄 알면 따로 배울 필요도 없다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얼마 후 자가용 승용차를 구입하면서 오토바이와의 인연은 끝났지만 그렇다고 할리의 꿈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때마침 개봉한 크리스 미첨과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 `썸머타임 킬러'라는 영화에서 크리스 미첨이 까만 선글라스에 가죽점퍼를 입고 석양을 향해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에 매료된 후 할리의 꿈은 더 커져만 갔다. 그러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할리의 꿈을 쉽게 이룰 수는 없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할리를 만날 수 있는 단한번의 기회가 있었다. 은퇴하고 집을 지을 때였는데 집짓는 비용을 잘 조절하면 할리 중에서 가장 작은 모델정도는 장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꿈을 키우면서 집짓는 일을 시작했는데,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공사기간도 길어졌고, 비용도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쓰고 말았다.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던 할리의 꿈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할리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가끔은 내가 고독한 라이더가 되어 지평선에 걸려 있는 태양을 향해 끝없이 질주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꿈은 이루지 못했다고 꼭 허망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루지 못한 꿈이 아름다운 환상으로 남아 삶을 더 향기롭게 하는지도 모른다.

새봄은 우리들 모두가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 때이다. 꿈은 크든 작든 우리의 삶을 생기 있게 하고 살아갈 이유가 된다. 비록 이루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꿈을 꾸는 새봄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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