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뽑기와 도깨비 신드롬
인형 뽑기와 도깨비 신드롬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7.02.1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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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인형 뽑기는 공간에 대한 갈망이다. 도깨비는 시간의 지배를 상징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경계의 구분이 반드시 진리일 수는 없다. 다만 인형 뽑기와 도깨비에 대한 신드롬이 시공을 초월하는 간절함에서 비롯된 조바심의 표현임은 뚜렷하다.

주말 성안길 촛불집회의 공간 바로 옆에서 인형 뽑기에 열중하는 청춘의 모습이 살벌하다. 어느 순간에 그렇게 늘어났는지 허풍을 좀 보태면 두 집 건너 하나씩 들어선 오락실에서 현실의 청춘들은 스틱을 조종하느라 여념이 없다.

밀폐된 공간에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는 인형을 꺼내는 일은 비장하다. 세월이 거듭될수록 겁박이 되고 있는 청년실업의 시대, 탈출구가 별로 보이지 않는 청춘들의 비장한 인형 뽑기 조종은 어쩌면 자신들 스스로를 구원받고 싶은 처절한 안간힘의 서글픔이 있다.

궁핍한 주머니 사정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몰입하는 청춘의 서러움에는 그 짧은 순간 인형을 통해 구원의 메시아가 되는 공간 확보의 착각이다. 이 시대 청춘은 일자리라는 공간 없음에 목이 타들어 간다. 인형이 예쁘거나 밉고를 가리지 않고, 크거나 작은 걸 탓할 겨를이 없다.

그러나 이 또한 만만치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 아닌가.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임대임이 분명한 자리를 차지하고 푼돈을 그러모아 큰돈을 모으겠다는 욕망을 조작을 통하지 않고 어찌 충족할 수 있으랴. 정확하게 조준을 하고 조심조심 끌어올려도 제멋대로 힘을 풀어 인형을 떨어트리고 마는 탄식. 그 절망의 순간에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인형 뽑기는 궁핍하고 초라한 청춘의 아픔이다.

그들에게 제발 마음만이라도 풍요롭게, 또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해 줄 용기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게다가 촛불을 외면하는 생각 없음을 탓할 자신이 있는 어른은 몇이나 될까.

인간과 똑같은 모양을 한, (아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비주얼을 지닌)도깨비가 한국은 물론 인근 나라에도 신드롬처럼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인간 세상을 활보하는 도깨비는 영겁에 가까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지고지순의 사랑을 거침없이 구가한다.

도깨비와 저승사자가 등장하고 (죽을)운명조차 뒤집히는 상상의 세계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원불멸의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드라마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현실과 유리된 공간의)문만 열고 나가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이루지 못할 일이 없는 초능력은, 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별반 없는 빈곤한 청춘에게는 로또복권 당첨 같은 환상이다.

대개의 사랑 타령 드라마가 그렇듯이 도깨비가 아니더라도 사랑의 한 축인 남성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재벌2세이거나 최소한 확실한 자기 공간을 확보한 `실장님'정도는 되는 자본의 힘이 있어야 사랑은 해피엔딩이 된다. 궁핍한 청춘에게는 극도의 부러움일 뿐이다.

`제비꽃같이 조그맣고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 당기'고,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지는 사랑.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는 물리적 사랑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던'시절.

그런 청춘의 빛이 찬연한 봄을 앞당길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래도 끝날 때까지 내릴 수 없는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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