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자유
장자의 자유
  • 이영숙<시인>
  • 승인 2017.02.12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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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 이영숙

멀리 조각배를 타고 물고기를 낚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장자(莊子)의 자유를 누리는 한유로운 모습이다.

`혜고부지춘추(??不知春秋), 조균부지회삭(朝菌不知晦朔)'-쓰르라미는 여름 한 철만 살기 때문에 봄가을을 모르고 조균은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기 때문에 그믐과 초하루를 모른다. 우리도 그러한데 보장된 내일도 아니면서 천 년을 살 것처럼 일을 벌이고 산다. 모처럼 일을 내려놓고 머리를 식히고자 찾은 진천 농다리 둘레길, 그러나 몸과 정신은 분리되어 오롯이 그 시간대에 머물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이다. 미루나무만큼의 높이에서 뱁새로 살면서 어찌 대붕의 자유를 말할 수 있을까.

마치 조각배의 두 사람 모습이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주인공 줄무늬애벌레가 만난 노랑애벌레 같다. 치열한 경쟁을 하며 꼭대기를 향해 기어오르는 기둥에서 만난 노랑애벌레는 주인공이 깨달은 통찰이다. 경쟁하듯 오른 기둥의 끝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허탈감만 느낀 줄무늬애벌레는 그를 통해 나비로 진화하는 법과 꼭대기는 기어가는 곳이 아니라 날아올라야 하는 곳임을 깨닫는다. 나비와 대붕이 되지 못하는 애벌레와 뱁새의 하루가 싱겁게 흐른다.

진화가 덜 된 겨자씨만 한 눈으로 강물 위 풍경을 넣으려니 화면 가득 무표정한 내가 보인다. 그 모습을 잡겠다고 또 하나의 셔터가 나를 향하고 길옆 반사경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나란히 담는다. 순간 큰 웃음이 씨앗처럼 터진다. 절묘한 순간의 깨달음이다. 벗은 누렇게 말라 흐느적거리는 풀대를 젖히더니 미국자리공을 찾아낸다. 단추처럼 오밀조밀한 동그란 속대 두어 개를 꺼내 액세서리로 달아주고는 아이처럼 방실거린다. 하나 둘 식물의 이름을 알고 나니 산행이 달라진다. 납작하게 떨어지는 세속의 시간은 겨울나무 빈 가지에 걸어두고 뉘엿뉘엿 해 질 녘까지 흐느적흐느적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몸처럼 마음도 가벼워진다.

가끔은 느닷없이 찾아와 낚아채듯 산과 들로 데리고 나서는 벗이 있어 좋다. 봄이 오면 생강나무의 알싸한 향기를 맡게 하고 여름이면 환삼덩굴로 훈장을 달아주며 가을이면 박하 잎을 따서 고된 목을 풀어주는 호모루덴스(Homo Ludens), 야생에서 놀이하는 자연을 닮은 사람이다. 오늘은 예고 없는 일정이지만 현기증을 일으키는 도심에서 벗어나 잠시 고대의 호모루덴스로 살아본 시간이다.

온 생애를 흔들어대던 고된 노역이 주홍빛으로 저물어가는 시간, 돌로 이어진 지네 모양의 농다리를 건너오면서 물살을 타고 헤엄치는 물고기 지느러미에 눈길이 닿는다. 내 장딴지는 천 년을 버티는 농다리의 기둥도 못되면서 비계만 키우고 깊은 코는 젖은 머리카락에서 난다는 사과 반쪽의 냄새도 모르지만, 물살을 어르는 물고기의 몸짓에서 어렴풋이 진리를 포착한다.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하얀 고치들이 비듬처럼 떨어진다.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서 이제는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자유와 대붕처럼 구만리를 나는 자유를 누려야 할 때이다. 기약된 내일은 없다. 문장의 퇴고(推敲)는 가능하지만, 인생은 퇴고할 수 없으므로 오류 많은 과거 일로 후회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느라 오늘을 저버릴 수는 없다. 오늘 같은 내일이라야 미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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