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찍어야 눈을 감아도 떠오르나니
마음으로 찍어야 눈을 감아도 떠오르나니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7.02.09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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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향했다. 안개에 발목 잡혀 공항에서 여섯 시간가량을 연기처럼 날리고, 제주에 도착하니 어느덧 오후 3시를 훌쩍 넘었다. 오분자기뚝배기를 먹자 식곤증이 몰려왔다. 한라산은 다음 날로 미루고 대신 동백꽃을 만나러 식물원으로 차를 몰았다.

식물원 초입에 이르자 `오늘만은 천천히 느리게'라는 글씨가 내 시선을 멈추게 했다. 늘 바쁘게 사는 내게 일침을 가하는 글귀였다. 글귀를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니 이번엔 바위에 `동백꽃의 꽃말은 그대만을 사랑해입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내게도 그대만을 이라는 대상이 있었나 곰곰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비록 안개 때문에 늦은 출발을 했지만 이날만은 천천히 느리게 내 삶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아본다. 카멜리아힐 식물원을 산책한 후 또 다른 동백꽃을 보기 위해 우리는 위미 마을로 향했다.

그녀들을 만난 건 동백이 빨간 웃음을 터뜨리는 위미 마을에서였다. 은순 언니와 나는 서로 번갈아 가며 사진 찍었다. 그러다 둘이 함께하는 사진도 찍고 싶었다. 팔짱을 끼고 지나가는 그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 둘의 추억을 찍어달라고. 그녀들은 잠시 멈춰 은순 언니와 나를 앵글에 담았다. 고마운 마음에 그녀들도 찍어준다고 하자, 그녀 둘 중 키 큰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마음으로 찍어야 눈을 감아도 떠오르나니.” 본인들은 마음으로 찍는단다. 그렇게 우리는 겨울을 찍었다. 우리는 카메라로 그녀들은 마음으로. 그녀들이 우리에게 물었다. 어디서 묵을 예정이냐고. 자신들은 아직 숙소를 안 정했다고. 우리가 서귀포호텔로 갈 거라 하자 그녀들도 함께 가자고 했다. 그녀들은 경주에서 왔다고 했다. 전에 제주에 일 년을 살았다는 키 큰 그녀는, 제주를 어느 정도 알기에 아무 예약 없이 왔다고 했다. 그녀들과 함께 다음날 갈 곳을 계획했다. 그녀는 제주에서 가봐야 할 곳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 날, 키 큰 그녀의 안내로 섭지코지에 갔다. 독특한 모형의 돌들이 군데군데 있고, 맑은 하늘과 바로 앞에 푸르게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눈 위의 하늘과 코앞의 바다를 번갈아 보며 오래오래 걸었다. 하늘과 바다의 묘한 대비 속에 섭지코지의 산책은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 주었다. 키 큰 그녀는 우리를 커피 박물관으로 안내했다. 커피 박물관에 들어서자 창밖으로 세찬 눈발이 흩날렸다. 박물관에는 오랜 커피의 역사와 함께 각국의 커피 내리는 도구들, 여러 가지 핸드드립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층의 박물관을 돌고 이층 커피숍에 지친 몸을 부렸다.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영화 `가위손'을 연상케 하는 눈발이 흩날리는 풍경 속에 아련한 슬픔이 눈발처럼 쌓이는 듯했다.

마지막 날, 키 큰 그녀의 안내로 올레 시장에 들렀다. 우리는 오매기 떡을 사고 공항을 향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시간을 공유한 여행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제주의 날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키 큰 그녀, 작고 조용했던 또 한 명의 그녀, 그리고 은순 언니. 내게 모두 소중한 사람이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날 들이다. 키 큰 그녀의 말이 뇌리에 스친다. “마음으로 찍어야 눈을 감아도 떠오르나니”조용히 눈을 감고 머리를 의자에 기대 본다. 지나간 제주에서의 며칠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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