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탑
전설의 탑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7.02.0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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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절집 주변을 에워싼 수많은 돌탑들에 시선이 머문다. 대웅전 앞 너른 마당에는 돌탑들이 오종종하게 쌓여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예불 드리는 스님들처럼 정갈해 보인다.

돌의 질감이 소박해서 정겨움이 묻어난다. 그 돌탑의 풍경에 반하여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먼 길을 달려왔다. 이번이 두 번째 걸음이다. 지난 가을 우연히 들러 눈도장만 찍고 갔었다. 이곳 탑사(塔寺)는 진안의 마이산자락에 자리한 사찰로 돌탑으로 유명한 곳이다. 80여 기의 돌탑들이 주변과 조화를 이뤄 장관이다.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절집은 작지만 아담하고 고즈넉하다. 나는 부처님께 삼배 올리고 천지탑으로 향했다.

천지탑은 탑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기암절벽 사이로 좁은 돌계단을 밟고 올라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귀한 것은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듯 벼랑 끝을 올려다보니 아득하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가파른 돌계단을 조심스레 오른다. 내린 눈이 쌓여 빙판길이다.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모자를 눌러쓰고 목도리를 휘감았지만 칼바람에 손이 시리고 귀가 얼얼하다.

가까스로 천지탑에 올랐다. 풍경은 뒷전이고 앞만 보고 정신없이 기어올랐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다리가 뻐근하고 몸은 천근이지만 벅찬 기쁨으로 가슴이 설렌다. 밤새워 쓴 글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은 기분이다. 거대한 돌탑 앞에서 밭은 숨을 고른다. 원추형으로 견고하게 쌓은 천지탑은 높이가 13.5m이고 한 쌍으로 나란히 서 있다.

옛날 이갑용처사가 수행하면서 쌓은 탑이라 전해지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높이 솟은 육중한 탑의 절묘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단 하나가 아닌, 수십만 개의 돌들로 뭉쳤으니 돌무덤이라 해도 좋으리라. 그것은 크고 작은 돌, 둥그렇고 넓적한 돌, 모난 돌들로 층층이 쌓여 서로 한 몸을 이뤘다. 얼마나 덕을 쌓고 공을 들였을까. 아무리 거센 강풍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니 백여 년의 전설을 담은 신비의 탑이다. 밤낮없이 불공을 드리며 고행 끝에 빚어낸 돌탑이 아닌가 싶다. 고단한 세상,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에 돌탑으로서의 소명을 다했으리라. 거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수많은 염원을 담고 있다. 세상에 기도하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게 어디 있겠는가. 나는 참선하는 마음으로 합장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돌탑은 언제 어느 때든 누구를 마주하더라도 공평하게 늘 귀를 내어준다.

나는 왜 기다리는 이도 없는 이 탑사를 찾아온 것일까. 덕이 높은 고승들처럼 심오한 경전의 뜻은 알지 못한다.

나는 절실한 불자도 아니다. 다만 탑사에 머무는 동안 사람에 대한 미움과 물욕을 버린 겸손한 마음이었다. 마이산 설경(雪景)만큼이나 뼛속까지 맑아지는 듯했다. 우리의 삶도 시간의 탑을 쌓는 것이리라.

그것은 하루아침에 로또복권처럼 당첨되는 게 아니다. 탑사의 돌탑처럼 소소한 사랑이 켜켜이 쌓여 견고해진다면 모진 세파에도 무너질 리 없다. 전설의 탑 또한 비바람에 풍화가 된다 해도 수많은 사람의 극진한 소원을 담았으니 무너지지 않으리라.

탑사를 내려오는 길,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얼마만의 고비 경험이던가. 엄동설한에 오르내리는 일이 힘들었지만 도전했다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하다. 고행 끝에 느껴보는 희열, 성취감 때문인지 자신감이 생긴다. 부끄럽게도 쌓은 덕도 사랑도 부족한 나는 지금 미완의 탑을 쌓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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