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언제나 옳다
세상은 언제나 옳다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7.02.07 2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 정규호

Jtbc 뉴스를 본 뒤 한나 아렌트를 읽다 잠이 들었다. 깊은 밤 꿈이 내게 찾아왔는데 모처럼 생생하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꿈속에서 이문세가 덕수궁 돌담길에서 노래를 불렀다. 기이하다. 가수 이문세가 내 꿈속으로 찾아와 부른 노래는 `찢기는 가슴 안고 살아왔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로 시작되는 <광야에서>이다. 어울리지 않는 가수와 노래의 인연이 신기할 정도로 기이하다.

더 깊게 각인된 꿈은 노래를 마친 이문세가 나에게 “세상은 언제나 옳다”라고 한 말이다.

<광야에서>는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를 노래한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을 찬양한다.

그런 수직과 수평의 아우름을 우리는 촛불과 태극기로 편 가르며, 노랫말처럼 `가난'과 `주저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일을 70년이 지나도록 여태 거듭하고 있다.

남과 북, 호남과 영남의 극단적 대립도 모자라 서로를 거짓이라고, 또 서로가 참이라고 여기는 맹목에 빠져 있다. 거기에 서로가 주장하는 `도덕적 동기'가 있을 터인데, 한나 아렌트는 이를 `공적 삶을 함께할 때 스스로 인간 경험의 한 차원을 열어 놓는 것을 의미 한다'고 했다.

광장의 촛불을 꺼트리려는 시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우연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악다구니로 버티는 비참함을 여태 애국으로 믿어왔던 배신감과, 어이없게도 `민주주의'를 외치는 최순실의 어처구니없음은 내밀한 소통의 신호가 되고 있는 꼴이다.

영화 <컨텍트>의 키워드는 `논-제로섬(non-zero sum)게임'이다. 아무도 지는 사람이 없음에도 결과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지 않는 희망은 그러나, 인간 스스로가 아닌 외계인의 도움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가 통하는 (인간의)언어라는 신호체계가 (외계인의) 이미지 문자와 소통하지 못하는 위기는 지금 촛불과 태극기로 맞불을 놓는 극단의 대립과 너무도 닮아있다.

옳고 그름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라져 있는 만큼 진실이 뒤집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름 소중하다고 여기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비극과 그로 인해 얻어지는 기쁨의 대립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촛불과 태극기를 막론하고 둘 다 `그 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촛불이 좌절되면 나라와 국민은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도탄에 빠지고 절망은 극대화되는 비극이 될 것이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그 반대의 상황이 되더라도 가난과 적화의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그리하여 거짓뉴스에 현혹돼 오직 믿고 싶은 것만 진실로 여기는 세력의 박탈감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극단적인 불신과 혐오를 행동으로 표현하며 혼란을 부추길 우려도 있다.

이문세가 느닷없이 내 꿈에 나타나 <광야에서>를, 그것도 덕수궁 돌담길에서 부른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쥔 뜨거운 흙'의 이름으로 광장에서 광야로 넓혀가는 확장성의 상징일 수 있겠다. 그리고 촛불이 횃불로, 또 들불로 번지는 용기와 희망의 멈출 수 없는 의지일 수도 있겠다.

다만 극단의 대립에서 생길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 탄핵의 끝장 대신 스스로 사퇴하는 일말의 양심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세상은 언제나 옳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논-제로섬 같은 것.

영화 <컨택트>에서 나는 이 대사가 맘에 들더라. “전쟁에 승자는 없다. 다만 과부만이 있을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