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민사 3. 안동김씨의 괴산세거
충민사 3. 안동김씨의 괴산세거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승인 2017.02.0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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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예로부터 산수가 빼어난 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많이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동안 훌륭한 역사적 인물들이 절승인 이곳 괴산에서 많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조선조 연산군 이후의 무서운 4대 사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전쟁, 그 뒤로 이어진 매서운 당쟁 등의 역사적으로 대혼란이 있던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국가 중대사를 조정의 핵심 관료로서 폭넓은 통찰과 격 높은 지혜로 슬기롭게 헤쳐나갔던 선조들이 있었다. 문화민족, 문명국가로서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던 많은 문무 재상과 목민관 및 유학자들, 이제부터 소개하는 분들은 괴산에서 나고 자란 후 충효를 다하고 한 몫을 다 한 후 괴산군 능촌리 백현묘원과 그 주변에서 영면하고 있다.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영상공 김석(金錫1495(연산1)~1534(중종29)이라는 김진사는 괴산으로 향하게 된다. 김석은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다.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해 겨울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 은사인 정암 조광조 선생이 화를 당하자 이를 피해서 외가인 의성김씨 집성촌인 괴산군 문광면 문법리와 전법리로 옮겨 살며 은둔불사 하였다 한다. 이곳 전법마을 입구에는 나무숲이 있는데 마을의 안녕과 복락을 위하여 공이 조성한 문법숲(일명 금석숲)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후학을 기르고 학문이 뛰어나 유명해진 김석이 살았다 하여 서거한 직후부터 김석골로 불리다가 차차 금석골로 오늘날까지 불리고 있다.

영상공은 아들이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세칭五甲) 차례로 충갑, 효갑, 우갑, 제갑, 인갑이며 장자는 충갑으로 호는 구암, 문과에 급제 후 지평, 헌납, 북평사를 거쳤다. 을사사화 때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천안으로 유배되었다가 안악 군수가 되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진주 대첩의 명장이신 아들 김시민 장군이 이곳 천안에서 나고 자라게 된다.

차자인 김효갑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수찬을 거쳐 아산 현감에 이른다. 3자인 김우갑은 진사가 되고 공릉 참봉에 봉해졌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불사하였다 한다.

4자는 문숙공 김제갑으로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홍문관 정자, 충청도 관찰사에 오르며 병조좌랑을 거쳐 임진왜란을 만난다. 왜장 모리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 원주를 침공해 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원주 치악산의 영원 산성에서 싸우다가 부인, 아들 시백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5자는 인갑인데 부친의 작고로 학문을 늦게 시작했으며 진사에 급제한 후 직장, 주부를 거쳐 영산현감, 비안 현감이 된다. 임진왜란을 만나 향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발병으로 몰하게 되었다.

영상공의 손자 대에서는 부평공 김시회가 있다. 구암 김충갑의 장자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 예문관 대교로서 홍섬. 이이 등과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한다. 부평 부사를 지냈으며 한효순. 이항복과 함께 홍문록에 올랐다.

충무공 김시민은 구암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한 후 진주 판관, 진주 목사가 되어 사천, 고성, 진해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이 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왜군 3만여 명을 아군 3800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세계 역사에 빛나는 진주 대첩을 이룬 인물이다.

충숙공 김시약도 구암의 6자로서 괴산에 와서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이 되어 왜적을 격파한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별장에 제수되었다. 창성부사가 되었을 때 후금의 대군이 공격해와 두 아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충의를 지켜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고향 청천에 초혼묘와 충효삼문, 현충비가 건립되었다. (2008村의香氣에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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