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의 황급한 퇴장을 보며
반기문의 황급한 퇴장을 보며
  • 임성재<칼럼리스트>
  • 승인 2017.02.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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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 임성재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급작스런 상황이라 그의 사퇴의 변이 무척 궁금했다. 몇 번을 보아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 온통 핑계뿐이다. 관료생활을 오래하고 외무장관까지 지낸 사람이 정치를 모를 리 없건만 정치풍토를 탓하고, 정치인들을 탓한다. 정말 몰랐다면 바보고, 알면서도 물러나는 변으로 뱉는 얘기라면 비겁하다. 대선 출마에 대한 욕심이 커 준비 없이 덤볐노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작년 11월 4일자 이 칼럼난에서 반 총장이 대선출마를 하지 말고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 남아 주기를 바라는 글을 쓴 바 있다. 그건 진심이었다. 어른이 없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는 날부터 웃음거리 행동을 보이며 대선행보를 이어가더니 결국은 이렇게 황급히 대선열차에서 내려왔다.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다. 반기문의 불출마 선언소식을 들으며 본보기가 되는 어른이 되기는 무척 어렵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렇지만 떠들썩하게 자신을 내 보이지 않지만 분명 어른다운 어른이 계시다. 내가 본받고 싶은 세 어른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한분은 한국화가시다. 칠순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하루 대부분을 작업에 몰두 하신다. 젊어서는 푸른 보리밭과 누렇게 익은 보리밭을 큰 화폭에 그려 보리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실적인 보리만 그려도 그 명성을 유지하며 여유로운 노년의 삶을 살 수 있으련만 그의 작품은 지금도 혈기 왕성한 청년의 것처럼 역동적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사실적인 보리가 반추상이 되고, 추상화로 변하여 생명의 씨앗으로 거듭나는 그의 화폭에는 자유가 넘쳐난다. 안주를 탈피한 화가의 정신이다. 그를 만나면 항상 희망찬 새로운 소식을 듣는다. 노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넘치는 원숙한 청년을 만나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의 앞에 서면 자꾸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삶은 너무 고요한가, 너무 일찍 늙어버린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또 한분은 퇴직한 선생님이다. 전교조 운동을 하다가 해직됐던 경력이 있는 해직교사 출신이다. 이후 복직하여 평교사로 정년퇴직한 그는 퇴직과 함께 `골목쟁이'라는 개인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이 공간은 선생이 거문고를 연습하는 연습실로, 책을 읽는 공부방으로 사용하면서 장소가 필요한 모임들에게 제공해주기도 하는 열린 공간이다. 해방둥이인 그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다. 꾸준한 공부를 통해 맥 컴퓨터와 동영상 카메라 등을 전문가 수준으로 다루면서 자신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봉사한다. 또 40여회의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한 마라톤 맨 이었고, 지금은 자전거를 이용해 전국일주 여행을 다니는 진정한 여행자이며 인내의 아이콘이다. 조그마한 체구에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도움과 배려를 소리 없이 실천하고 타인에게 티끌만큼의 폐도 끼치지 않는 참 어른이다. 그를 만나면 나의 언행을 돌아보게 된다. 헛된 말과 행동으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준일은 없는가 하고.

마지막 한분은 퇴직한 교수님이시다. 그는 대학에서 교육철학을 가르쳤는데 5공화국시절에 필화(筆禍)로 해직의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대학에 복직한 후 그는 서양고전 읽기운동에 나서 1991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청소년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12년 과정의 위대한 저서 읽기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퇴직 후에는 퇴직금을 털어 대구 팔공산 자락에 건물을 구입해 `파이데이아 북 카페'를 열고 시민들의 공부방으로 만들었다. 이제 퇴직한지 10년째가 되는 그의 삶에 은퇴란 없는듯하다. 지금도 100여명의 회원들이 요일별로 책을 읽으러 찾아오고, 그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며 삶의 향기와 깊이를 더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를 만나면 인자하고 너그러운 어른의 덕목과 삶의 지혜를 배운다.

한국화가 박영대 화백과 고홍수 선생, 그리고 파이데이아 신득렬 원장이 그들이다. 나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도 나에게 이 세분처럼, 국민들의 어른으로 남아주기를 바랐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첫 유엔사무총장으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참 어른으로, 외교와 관련한 자문으로 나라에 이바지하며 세계를 향한 꿈을 꾸는 젊은이들의 아이콘으로 남아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이제 안타깝게도 그의 자리는 없어 보인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주는 세 분 어른들의 모습과 황급히 대선열차에서 내려오는 반기문의 모습이 명암으로 나뉘어 도드라져 보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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