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독립 운동가 우덕순 의사를 아시나요?
비운의 독립 운동가 우덕순 의사를 아시나요?
  •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 승인 2017.02.01 1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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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역사기행
▲ 김명철

의병의 고장 제천 출신 우덕순 의사를 아는 분은 많지 않다. 우연준(禹連俊)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우덕순 의사는 충북 제천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건국 초기 정치인으로 활동하셨던 분이다. 안중근의사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하며 나라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이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의 동지다.

1909년 10월 26일에 만주 하얼빈 역에서 터져 나왔던 안중근의사의 통쾌한 총성을 100년의 세월과 수천리의 공간을 초월하여 선명하게 듣게 된다. 안 의사의 위대한 결행, 나라와 민족, 그리고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위한 위대한 독립 운동가를 떠올린다. 안 의사와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민족의 원수인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다른 역에서 기다리던 또 한 분의 독립 운동가가 단운(檀雲)이라는 호를 쓰는 제천 출신의 우덕순 의사이다.

우덕순 선생은 뜻이 있어 서울로 상경하여 동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 민족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국외로 나가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민족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인식한 우덕순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을 통해 민족운동을 추진하였다.

1907년에는 무장 투쟁에도 관여해 안중근, 이범윤과 함께 의병을 양성하였다. 1년 후 이때 양성한 의병들 300명을 직접 이끌고 국내 진공작전을 개시하였다. 함경북도 경흥과 회령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체포된 선생은 일본에 의해 7년형을 선고받고 함흥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일제의 감옥은 선생의 나라 사랑의 열정까지 감금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일제의 감옥에서 탈출한 것으로 유명한 분이다.

1909년 봄에는 노우키에프스크에서 안중근 김기열 등과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했으며, 그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 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에 동참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지역을 순방하는 이토 히로부미가 채가구 역에서 내리면 우덕순 의사가 처단하고, 하얼빈 역에 하차하면 안중근의사가 처단하기로 약속하였다. 우덕순은 채가구 역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이토히로부미가 채가구 역에서 내리지 않고 하얼빈 역에 하차한 것이다. 이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 뒤 우덕순 의사도 공범자로 체포되어 뤼순에서 함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징역 3년 형을 언도받게 되었다. 우 의사는 옥고를 치르던 중 함흥 감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 2년 형량이 추가되어 1915년이 되어서야 출옥할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우 의사는 만주 지역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에 힘썼고, 광복 후 흑룡강성의 한인민단 위원장으로서 아들 대영과 함께 동포들의 본국 수송에 힘썼다.

귀국한 뒤에는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해 9월 26일 북한군에게 안타깝게도 희생되고 말았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 생애를 조국에 바치신 분, 우리 고장 출신의 위대한 민족 지도자 우덕순 의사를 기억하며,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숨은 애국지사들을 찾아내어 현창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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