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 아줌마
박카스 아줌마
  • 배경은<충북기독병원 원무과>
  • 승인 2017.01.1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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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배경은<충북기독병원 원무과>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런 논리에 대입하여 그중에 백미는 아마도 `엄마 역할'일 것이다.

어김없이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낮에 먹을 식사와 간식을 챙겨 놓고 출근하는 길은 아침부터 피곤하다. 왕복 두 시간의 출퇴근 시간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시기이다.

퇴근길 막바지에 이르러 집 근처에서 갈등한다. 그러다가 참치김밥이나 햄버거로 저녁을 해결할 때가 자주 있다. 수능을 마친 딸은 다행히 아르바이트하는 매장에서 저녁을 먹는다.

20여 년이 넘어도 역할극에 부적응 중인 엄마 덕에 아들은 혼밥으로 대충 해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배도 고프지만 엄마도 고프다'는 아들의 뭉클한 투정 앞에 한없이 미안하고 작아진다.

자라면서 친정엄마는 한 번도 `역할'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입고 싶은 옷은 언제나 옷장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내 방은 늘 단정했으며 운동화는 빈틈없이 깨끗했다.

가끔 엄마의 심부름으로 널려 있는 빨래를 걷을 때면 잘 익은 햇볕 냄새가 났다. 엄마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그림자 노동'으로 먹고 입고 자랐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삶도 노동자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해서 전태일 열사나 그 시대 여공들의 노동을 신성시하고 자본주의 착취에 대해서만 공분했지 희생과 헌신, 혹은 사랑이라는 달달한 포장으로 정작 착취당하는 엄마의 `그림자 노동'에 대해서는 외면한 것을 반성한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소수자의 역할극은 외롭고 쓸쓸하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마의 절대적인 그림자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 귀한 노동의 수혜자임에도 나는 엄마와 같은 생은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역할'은 영혼이 없이도 가능하다. 집안으로 퇴근하자마자 정신병원 원무과 직원에서 엄마로 모드전환이 전자동으로 작동한다. 관성의 법칙을 따라 싱크대와 냉장고를 오가며 아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다보면 나른한 절망이 엄습한다.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하고 `엄마 역할'에 힘을 다 쏟고 나니 쉬고 싶다는 욕망이 말초신경에 가득해지기 때문이다.

늘 읽어야 하는 책들과 공부, 그리고 몸속에 지방이 쌓이듯이 쌓여가는 급하거나 완만한 집안일들 앞에 마음 둘 곳이 없다.

얼마 전에 집과 차에 박카스를 들여 놓았다. 아이들이 `박카스 아줌마'라는 놀림에도 기죽지 않고 즐기는 것은 플라시보 효과라도 기대하는 마음과 이미 아침으로부터 지친 저질체력에게 주는 나름의 게으른 대안이다. 가슴 한켠에서는 좋은 `엄마 역할'과 존재 자체로서의 내 삶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힘에 부친다. 이 분열적 자아를 바라보아야 하기에 엄마로 산다는 것은 부적응과 설움 사이에서 부유하는 물풀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제 서야 `충분한 역할'에 대해 고민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것들과 결을 맞추어가는 연습으로 삶은 손에 잡히지 않은 추상명사에서 조화롭고 명쾌한 하루가 모인 다발이 되기를 기대한다. 설거지를 나눗셈에서 떨어지는 나머지처럼 남겨두고 니체를 읽는다.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앞에 두고 가슴이 뛴다. 나만의 `역할'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앞으로의 나를 자라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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