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밥
고두밥
  • 김용례<수필가>
  • 승인 2017.01.1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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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용례

코가 싸하게 바람이 차다. 올 들어 수은주가 가장 낮게 내려갔다. 방문할 집의 안주인을 생각하며 수선화 몇 송이를 작은 바구니 담았다. 부모산 자락에 자리한 아담한 한옥이다. 햇볕이 쌩끗 드는 작은 마당에서 광목 앞치마를 두른 안주인이 햇볕을 닮은 미소로 손님들을 맞이한다. 마당 한켠의 아궁이에서 장작이 타고 무쇠 솥에서 김이 나고 있다. 이 풍경만으로도 따뜻하다.

지난 주말에 충북무형문화재 신선주 체험 및 인문학특강이 있었다. 이 집의 안주인을 알게 된 것은 지면을 통해서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한 자리에서 차를 마셨다. 그 후 한 번 와라, 가겠다만 반복하다가 드디어 만났다. 오늘 인향과 주향에 흠뻑 취해보리라. 안주인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단아하다.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4호 청주 신선주 이수자 박준미씨다.

삼 십여 명이 모였다. 박준미 이수자로부터 신선주의 유래와 술 빚기 과정을 들었다. “술은 문화고 음식이다. 땀 흘려 일하고 마시는 약주 한 사발은 배고픈 시절 약이었고 음식이었다”고 했다. 함양박씨 종가에서 접대용으로 사용했으며 18대째 집안대대로 400년간 내려오는 가양주란다. 12가지의 약재를 넣어 술을 빚는다. 술을 빚는 과정은 지난한 일이다. 쌀을 씻고 고두밥을 지어 식혀서 누룩을 넣어 혼화 과정을 거쳐 항아리에 입항하는 과정까지 오늘 체험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기다리는 일이다. 백세, 꼭 백 번을 씻어야 한다기보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쌀을 씻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쌀을 10시간 이상 담가놓았다가 고두밥을 짓는 것이다.

고두밥을 짓는 동안 권대근 교수님이 `인문학과 전통주, 삶의 결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전통으로의 복원이 중요해진 이유는 과거의 온기를 미래로 실어 나르는 것. 술이 `이성'을 낯설게 만든다면 인문학은 `사유'를 낯설게 만든다고 했다.

강의를 듣는 동안 고두밥이 다 지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두밥을 보고 다들 함성을 지른다. 밥으로 손이 간다. 손으로 먹으며 어린 시절 먹었던, 먹다가 혼났던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은 밥 냄새를 맡고 모여들고 어른들은 쫓고 고두밥을 움켜쥐고 달아나던 계집애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고두밥은 추억이다. 고두밥은 밥그릇에 뜨거나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먹지 않는다. 상차림 해서 정식으로 먹는 밥이 아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남자고 여자고 다 손으로 먹는다. 그 밥맛을 잊을 수가 없다. 고두밥은 못 먹어서 서러웠던 기억이 아니라 즐거운 맛의 기억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맛있는 음식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가. 그런데 특별할 때 조금 먹었던 고두밥의 맛은 잊히지 않는다. 술이 만들어지면 고두밥의 존재는 잊어버린다. 술의 밥이다.

식힌 고두밥과 누룩을 혼화하여 옹기항아리에 정성스럽게 담가놓았다. 뭔가를 이루려면 희생과 기다림이 필요한 것처럼 술이 익기까지 오랜 기다림이 있어야 한다. 돌아오는 길 안주인은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신선주를 들려주었다.

며칠 있으면 우리 고유의 명절, 설이다. 올 차례 상에 신선주를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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