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마법
눈의 마법
  • 김태봉<서원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7.01.1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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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춥고 삭막한 겨울을 따뜻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는 눈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삽시간에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은 겨울 풍광의 백미가 아닐 수 없지만, 이는 단지 시각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눈이 없을 때만 해도 평범한 세속의 공간이었던 것이 눈으로 인해 졸지에 탈속의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홍간(洪侃)은 이러한 눈의 마법을 두 눈으로 목도하였다.

 

눈(雪)

晩來江上數峯寒(만래강상수봉한) 강 위로 날 저무니 봉우리들 차가운데
片片斜飛意思閑(편편사비의사한) 가볍게 비스듬 눈 내려 마음이 한가로워라
白髮漁翁靑蒻笠(백발어옹청약립) 흰 머리 낚시 노인 푸른 삿갓 썼는데
豈知身在畵圖間(기지신재화도간) 제 몸이 그림 사이에 있는 줄 어찌 알까?

 

겨울 어느 날 시인은 눈이 만들어내는 가장 황홀한 장면을 만날 수 있는 곳에 우연히 머물고 있었다. 그곳은 강이 흐르고 있고, 그 주변을 첩첩이 산봉우리가 에워싸고 있었다. 시간도 마침 해질 무렵으로 흥취가 배가되는 시간대였다.

한겨울이라 한낮에 잠깐 누그러졌던 추위가 저녁에 접어들면서 다시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의 지시라도 떨어졌는지, 때맞추어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날은 차갑지만 바람은 사납지 않았던 듯, 눈은 살랑살랑 비스듬하게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강이고 산이고 조금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눈의 별천지가 되었다. 시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눈뿐이었다. 그런데 눈 천지를 훑어보던 시인의 눈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바로 눈 덮인 강 위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푸른 삿갓의 노인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이고 난 뒤, 모든 것은 미동도 없이 숨죽이고 있었다. 예외가 있다면 관찰자인 시인 자신뿐이었다.

이러한 정적인 공간에 움직이는 물체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돋보이겠는가?

푸른 삿갓을 쓴, 나이 든 어부는 눈 천지가 되기 전까지는 생업으로 물고기를 잡든, 은거(隱居)하며 세월을 낚든,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덮여 온 세상이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으로 되고 난 뒤, 그 평범한 어부는 그림 속 주인공이 되었지만, 막상 자신은 그러한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참으로 물아일체(物我一體)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눈은 단순한 경치가 아니다. 눈은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일시에 사라지게 하고 마음의 근심마저도 잊게 하니, 가히 겨울의 마법사라고 부르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할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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