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없고 숙제는 많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시간은 없고 숙제는 많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7.01.15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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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그제 고향인 음성과 충주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고향 뿐만 아니라 국내 어디서든 환대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일부 외신의 부정적 평가도 있다지만 그는 지난 10년간 최대 국제기구인 유엔을 무난하게 이끌었다. 회원국에 실효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여한 `파리기후협정'과 유엔의 미래 청사진을 담은 `2030 지속가능 개발목표(SDGs)' 등은 대표적 치적으로 꼽힌다. 그는 “재임 중에 지구를 100바퀴 이상 돌고 달나라를 6번 왕복하는 거리를 이동하며 열정적으로 일했다”고 자평했다. 그의 타고난 성실성에 비춰 빈말은 아닐 것이다.

아쉬운 것은 그가 국민들로부터 나라의 위상을 높여준 노고를 치하받을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국민들 역시 그에게 한가한 덕담을 베풀 계제가 아니다.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 그의 신분은 전 유엔 사무총장에서 냉혹한 심판대가 기다리는 대선 후보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항에 도착해 그동안 제기된 뇌물수수 의혹부터 해명해야 했다. 현재 그의 위치를 확증하는 장면이었다.

10년의 가쁜 노정을 마치고도 위로보다 추궁과 비판에 직면해야 할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정글 진입을 위한 재무장이다. 반 전 총장은 탄탄대로를 걸어온 정통 관료 출신이다. 능력에 관운까지 따라줘 시련도 기복도 없이 순항만 거듭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관료주의'라는 깔아놓은 멍석에서 발휘됐다. 스스로 멍석을 깔고 자신을 시험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약육강식의 살벌한 정치판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다. 2007년 대선에 나섰다가 중도하차 한 고건 전 총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않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모두 직업 공무원으로 출세가도를 질주해 정점에 올랐다. 총리 두 번, 서울시장 두 번, 장관 세 번에 국회의원,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섭렵한 고 전 총리의 이력은 반 전 총장에 뒤지지 않는다. 여론조사에서 선전한 점도 유사하다. 고 전 총리는 초기 여론조사에서 박근혜·이명박 등 상대 후보들을 압도하며 1위를 달렸다. 그러나 정작 링에 올라간 그는 힘을 쓰지 못했다. 독자적 지지기반은 구축되지 않았고 여론조사는 급락했다. 기대했던 대통령과 여당이 등을 돌리자 그는 스스로 수건을 던졌다. 정치에는 관료사회와 달리 지침도 매뉴얼도 없다. 본능적으로 판세를 읽고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지략과 배포는 결과보다 절차에 치중하는 관료적 사고에서 배양되기 어렵다. 고 전 총리의 실패기에 대한 철저한 복기와 학습이 반 전 총장에게 필요한 이유다.

자처한 `진보적 보수주의자'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도 숙제다. `진보적 사고를 하는 보수주의자'라는 모호한 정체가 무엇인지를 설득력있는 비전과 정책을 통해 밝혀야 한다. 유권자들은 사드(THAA D)와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의 분명한 소신을 기다리고 있다. 갓 귀국한 그에게 답을 재촉하는 것은 성급하다고도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고 그 시간마저도 그의 편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조기 대선은 기정사실로 굳어가고 이미 다른 후보들은 전면전에 돌입한 상태다. 주요 아젠다를 경쟁자들에게 선점당한 반 전 총장은 차별적이고 참신한 정책 발굴에서도 불리한 입장이다.

해서 대낮에 등불을 들고다니면서라도 힘을 보탤 사람을 찾아야 한다. 안된 얘기지만 지금 그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서는 새 시대를 열어갈 역량은커녕 변화를 기대할 만한 구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국민이 납득할만한 인물을 찾고 삼고초려해야 한다.

의혹에 대한 정리도 절박한 숙제다. 그가 귀국하기 전날 동생과 조카가 미국 연방법원에서 뇌물 공여 혐의로 기소됐다. 그동안 반 전 총장 연루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온 사안이다. 박연차씨에게 23만달러를 받았다는 의혹도 선거기간 내내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렇지않아도 국민들은 설마했던 허무맹랑한 의혹들이 속속 사실로 드러나는 악몽을 겪었던 판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는 수준 이상의 명확하고 진지한 해명이 필요하다.

지역주의에 기대려는 유혹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영·호남이 정치적 벽을 허물면서 이제 지역할거주의는 구시대 유물이 됐다. `충청대망론'이니 `충청의 아들' 따위를 함부로 입에 올렸다가는 한순간에 추락한다.

반 전 총장은 “총체적 난관에 빠진 조국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이젠 국민의 아픔을 치유할 처방전을 서둘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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