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처럼 고요하게
순이처럼 고요하게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7.01.12 2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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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초록으로 풀어헤쳐진 낯선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해 겨울,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것 같은 식물을 처음 만났다. 둥근 와이어 안에 앉혀진 생경한 식물이었다. 초록 뿌리를 허공의 살갗에 심은 채 내게로 배달되었다. 뿌리 위에는 별처럼 생긴 핑크빛 꽃이 새초롬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처음 틸란드시아를 만난 건 2015년 겨울이었다. 그녀가 내 수필집 출간 선물로 보내온 식물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멈칫했다. 어쩌면 이런 식물이 지상에 존재하다니. 공중의 먼지와 수분을 먹고 자라는 식물이라 했다. 흙 없이도 식물이 자랄 수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내게는 충격이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하늘을 유영하며 살 수 있다는 말과 흡사하게 들렸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관리법을 물었다. 일주에 한 번만 물을 주면 된다고 하는 그녀에게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공중식물이라고.

주방 창가에 틸란드시아를 걸었다. 그리고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준 틸란드시아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순이라고. 순하게 자라서 순한 기운을 온 집안에 풍기라는 의미에서. 나는 아침마다 물을 마시며 창가에 달려있는 순이 에게 눈빛을 준다. “잘잤니? 나의 순이.” 그러면 순이는 푸른 침묵으로 대답을 한다.

순이는 이 년 넘게 창가에 달려 그네를 탄다. 햇살이 뜨거운 눈빛을 쏘지만 순이는 그 빛을 녹여 순한 초록으로 만든다. 뜨거운 볕은 순이의 정수리 위로 자꾸 고인다. 허공에서 부유하는 먼지를 삼키며 오랫동안 침묵한 순이는 시간 속으로 거미줄 같은 긴 뿌리를 뻗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침묵의 무게를 포획하면서 뿌리는 점점 자라고 있다. 가끔 바람이 밀어주는 그네를 타는 나의 순이.

순이는 어쩌면 나처럼 흔들리는 생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7층 아파트 공중 창가에서 사는 순이. 허공보다 더 허공인 허공에 떠서 흔들리는 순이. 공중에서 매일 자고 일어나며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흔들리는 생을 살고 있는 나. 복잡한 도시의 삶을 온몸으로 받으며 부딪히고 깨지면서도 웃음을 머금으며 살고 있는 나.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고 어지러워도 어지럽다고 비틀거릴 수도 없는 생의 무게와 책임감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리라.

머리카락 위로 등을 대고 눕는 먼지의 속살을 가만 가만 만지며 오늘도 순이는 그곳에 있다. 침묵이 그녀를 키우는 건지. 그녀가 침묵을 기르고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그런 순이를 보며 고요히 살기로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다독여 본다. 타인이 나를 아무리 날선 시선으로 본다 해도 그 시선 마져 고요히 녹일 수 있는 눈길로 살자고.

내게 순이를 알게 해준 그녀가 고맙다. 그녀의 온화한 눈빛과 빗지 않은 순이의 머리칼처럼 날리는 그녀의 푸석한 머리도 정겹게 다가온다. 늘 한결같이 웃는 그녀처럼 늘 한결같은 순이를 보며 나도 세상의 험한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한결같은 삶을 살기로 마음먹어 본다. 오늘도 허공에서 순이가 초록 미소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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