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젊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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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7.01.1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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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10년 됐나? 회의석상에 앉은 옆 교수와 이런 말을 나눴다.

그분은 나보다 열 살 정도 위였는데 내 말에 크게 공감한 듯했다. 이야기는 내가 회의 자료의 작은 글씨를 보려고 안경을 벗자 벌써 노안이 왔냐는 물음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다.

나도 노안이 왔는지 몰랐는데 일본에서 여행안내서 글씨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싶어 이리저리하다 안경을 벗으니 잘 보이는 것이 아닌가. 기차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후 동갑내기 벗들에게 소주병 작은 글씨를 놓고 읽어보라고 하면서 너희도 노안이 왔다고 골려준 것이 기억난다. 다들 자기는 아니라 했지만 작은 글씨 앞에서는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나만 늙지 않았다고 달래고 남이 놀라는 것에 즐거워한 심보였다.

회의석상에서 내가 한 말은 이랬다.

“나는 언제나 세상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자신도 있었고요. 그런데 세상이 나를 버릴 줄은 차마 몰랐어요. 이젠 내가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버리네요.”

이 이야기에 그 교수는 “맞아, 맞는 말이야.”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세상을 멀리 하기도 전에 세상이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내가 세계 속에서 능동적인 선택을 하던 시절은 가고 피동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나를 맞춰야 하는 시절이 다가온 것이다. 내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등지고 있었다. 하기야 `세상을 등지다'는 말은 `죽었다'는 것이니 할 말이 없다.

인생을 100살로 보았을 때 반은 쾌락이고 반은 고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처님같이 현명한 분은 모두 고통으로 보았지만(一切皆苦) 나는 잠시의 쾌락이라도 붙들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육체만을 따져보면 반반 이론이 맞는 것도 같다. 쉰까지는 몸뚱이가 기쁨을 주지만 그 이후부터는 괴로움을 주니 말이다. 그게 내가 말하는 반반설 곧 50:50 이론이다. 백세까지 살지 않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여태 벌어왔던 기쁨을 매일 그리고 철마다 까먹는 것이니 말이다. 나이 들면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단다.

노인들은 `아프지 않으면 서운하다'고 할 정도로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강조하고, 남이 자신이 아픈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고통의 생활화다. 고통의 사회화다. 그리고 고통을 통한 인정투쟁이다. 나 아프니 도와줘, 들어줘, 살려줘!

현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노쇠해지는 것을 오히려 기꺼워했다. 작은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크게 보라고, 들리지 않는 것은 들려도 들리지 않는 척하라고 그랬단다. 남은 삶을 크게 보고 젊은이에게 너그럽게 굴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젊은 학생이 작은 글씨로 논문을 건네주면 어쩔 수 없이 짜증스럽다. 종이 아낀다고 일반 글씨의 반으로 출력을 해오는데,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너희도 늙어봐'라고 외친다.

요즘 나에게 화가 많이 나있다. 오늘 아침에도 갑작스레 `젊은이는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어지기 어렵다'(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는 주자의 권학문 첫 구절이 떠올랐다. 유명한 `조금의 때도 가볍게 여기지 마라'(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는 구절 앞의 것이다. 예전에는 놀고 싶어서 연구실을 도망 나왔는데 이제는 저녁 무렵이 되면 눈이 아파서 책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이 중학생 때였는데 이제는 눈이 버걱거리는 노년이 되다니 늙기 정말 쉽다.

정부가 이제 과거의 노년층을 장년(壯年)으로 부르기로 했단다. 우리말에서도 젊은이와 늙은이 사이의 말이 필요할 때다.`OB'(old boy)처럼 말이다. `덜젊은이'어떤가? 나도 껴보자.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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