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그리고 악의 평범성
‘본질’, 그리고 악의 평범성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7.01.1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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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온 나라를 충격에 빠트리고 있음에도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있다.

최순실이 처음 검찰에 출두할 당시 30만원이 넘는 벗겨진 신발 한 짝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일 때부터 이미 포퓰리즘의 조짐은 있었다. 참사 당일 올림머리 손질 등 대통령의 치장에 분노하는 7시간의 의혹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국민의 고귀한 생명보다 개인적인 치장을 비난하는 흥밋거리 위주의 관심보다는 `왜 구조하지 못했는가'라는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통해 세월호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의 7시간이 낱낱이 밝혀진다 해도 참사의 원인과 `가만히 있으라'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구조 활동 등, 국가적 무능의 근본적 원인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촛불은 그 진실을 향해 빛을 내쏘아야 하고, 그 아픔의 치유를 위해 더욱 커져야 한다.

사람들은 최순실의 국정 농단에서 이어지는 탄핵 소추의 충격으로 나라가 1970년대로 회귀했다는 탄식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극이 국가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성장 일변도를 추구했던, 그리하여 부녀 세습으로 이어진 1970년대 박정희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반민특위의 무산에서 비롯된 친일세력의 청산 실패를 우리 현대사의 가장 쓰라린 순간이며, 이번 촛불혁명을 통해 반민특위의 부활을 주장해 왔다. 4.19를 비롯해 5월과 6월의 항쟁을 거치는 시민의 민주 염원에도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잔재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온갖 적폐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악과 모순, 왜곡과 불평등의 단초가 되고 있다. 단지 대통령을 탄핵한다고, 또 개헌과 조기 대선 정국으로의 진입을 획책하는 단순한 정권교체로는 촛불의 의미를 완성할 수 없다.

독일 태생의 유태계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렌트는 나치 정권의 유태인 학살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을 관찰한 뒤 쓴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역사적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으로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를 `악의 평범성' 또는 `악의 진부성(Banality of evel)'이라고 표현했다.

아렌트가 지적한 아이히만의 무능력은 사유의 무능력(inability to think), 말하기의 무능력(lnability to speak),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능력이 없음, 세 가지이다.

아직도 일본을 미화하고, 문제의식 없이 위안부 합의를 제멋대로 해버린, 그리하여 아베의 망동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함은 사유의 무능력과 똑같다. 그리고 국민을 개, 돼지로 서슴없이 표현하는 적폐들의 본질은 친일과 맞닿아 있으니, 말하기의 무능력이고, 도대체 살려 낼 생각조차 있었는지, 분노를 지울 수 없는 무능력은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능력이 없음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나치 독재정권이, 그리고 그 당시 그들의 나라가 저지른 유태인 학살은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만행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 끔찍한 학살의 주범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평범하고 건실한 가장이었음을 항변한다.

그럼에도 나치 전범은 심판을 받았고, 독일은 과오를 철저하게 반성하면서 과거를 부끄러워한다.

아이히만과 너무도 닮은 지금, 우리 사회에 악의 평범성은 도처에 있고 청산되어야 할 적폐는 여전하니,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세월호 1000일의 분노와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야 세상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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