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창
마음의 창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7.01.1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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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매서운 바람이 발목을 잡는다. 창밖에 벌거벗은 나무도 동안거에 들었다. 모든 생명이 초록빛을 거두고 침묵하는 겨울이면 집안에 들어앉아 책을 읽는다. 책을 볼 때면 으레 돋보기안경을 쓴다. 안경을 쓰면 희미하던 글자가 유리창 닦아놓은 듯 맑고 선명해진다.

오늘은 작가 한강의 소설을 펼쳐들었다. 책갈피를 넘기는데 안경 위로 겹쳐지는 해묵은 그림이 있다. 낯익은 풍경들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고향에서 함께 했던 정겨운 추억들이 애틋한 그리움으로 밀물처럼 밀려든다.

어린 시절 방학숙제로 수수깡안경을 만들어 갔는데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살짝 귀에 걸치면 가볍고 환하게 보였다. 할머니께서 마른 수숫대를 얻어다 만들어 준 것이다. 여름밤의 추억도 서려 있다. 별이 총총히 수놓던 밤, 할머니와 나는 뒤란에 멍석 깔고 자리 잡았다. 매캐한 모깃불을 피우고 연신 부채질 해주시며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그러다 할머니의 무릎 베고 안경이라는 동요를 즐겨 불렀다. 지금도 그 노랫소리가 아련히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할머니는 열여덟에 시집와 자식을 두고 서른다섯에 혼자 되셨다. 할아버지는 어느 여름 장마에 다리를 건너다 실종되셨다고 한다. 때문에 할머니는 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사셨다. 그래서인가. 할머니는 어스름한 새벽이면 몸단장하신 후 어두운 부엌에 촛불을 밝히셨다. 그리고 부뚜막에 정화수를 떠놓고 합장하고 계셨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머무셨던 할머니 모습을 훔쳐보던 날은 긴장감에 심장이 요동치곤 했다. 그때 보았던 할머니 모습은 참으로 숙연했다. 한스런 긴 세월을 청상으로 수절하리라는 할머니의 강인한 의지가 아니었을까.

내 돋보기안경 속에서 할머니의 지난 세월을 본다. 온기도 없는 빈방에서 얼마나 외롭고 추우셨을까. 아비 없는 자식들이 삶이고 꿈이었을 터, 산후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목욕탕에서 일하셨다니 자식 키우느라 고단했을 할머니 생각에 연민과 그리움이 쌓인다.

지금처럼 깊은 겨울에는 손뜨개질로 긴 밤을 지새웠던 할머니 모습이 생각난다. 폭설이 내리거나 칼바람에 문풍지가 파르르 흔들리는 밤이면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끼고 대바늘에 털실을 한 코씩 잡아 고리 사슬을 엮으셨다. 그때 할머니의 시신경(視神經)은 송곳처럼 뾰족해지셨다. 가끔 긴 한숨도 토해내셨다. 짜임이 늘어갈수록 할아버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까지 깊숙이 꿰어 마음의 고리를 엮었을 것이다. 그날 밤은 꿈에라도 할아버지를 만나 못다 한 회포를 나누셨겠지. 대바늘처럼 곧게 살다 가신 할머니께 손뜨개질은 홀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치유도 방편도 되었을 터이다.

할머니께서 내게 보여주신 삶은 어둠보다 밝음이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삶은 내가 올곧은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마음의 창이기도 하다. 이제 어릴 적 만들었던 수수깡안경도, 할머니와의 추억도 내 안에 그리움으로 멈추어 서 있다. 하지만 할머니의 삶은 내가 인생길에서 어둠에 갇혀 방향을 잃을 때마다 길을 밝혀주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고, 혹은 마음의 때가 끼어 탐욕의 도수가 눈을 어지럽힐 때 나를 바로 잡아 주리라.

나는 다시 돋보기안경을 쓴다. 안경 너머로 할머니의 질곡의 세월이 소설 속 슬픈 장면처럼 어른거린다. 할머니의 시린 마음을 알 것 같은 오늘, 안경 속으로 반사되는 햇살이 눈 부시다. 할머니의 삶이 아름다운 한 줄기 빛이 되어 내 안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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