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오름달, 새로운 시작
해오름달, 새로운 시작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7.01.09 1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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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해오름 달이다. 케케묵은 기억은 바람의 등에 태워 멀리멀리 날려 보내고 싶은 날이다.

현관문을 열고 발을 딛자 숲에서 굴러온 바싹 여윈 떡갈나무 잎이 밟힌다. 찬바람이 옷자락을 펼친 마당을 한 바퀴 돌고 그네에 앉아 온몸에 뿌려지는 가녀린 햇살을 받는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참새 한 마리, 적막이 그물처럼 내려앉은 마당에 앉아 무엇인가를 콕콕 쪼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걸까. 금새 푸드득 날아 허공의 살갗을 비집고 이깔나무 숲으로 멀어진다. 철삿줄 같은 햇살을 그네에 내어주고 일어나 텅 빈 하늘을 본다.

얼마 전, 새해맞이 청소를 하기로 했다. 걸레를 빨 따듯한 물을 뜨기 위해 가마솥 뚜껑을 열었다. 솥이 뻘건 쇳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녹물이다. 솥의 물을 다 비워내고 호스를 연결하여 다시 채웠다. 그리고 장작불을 지폈다. 그러나 또 녹물이 올라왔다.

앞집 영은이 할머니에게 달려가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솔가지를 잘라서 솥에 넣고 끓이면 송진이 코팅되어 녹이 안 슨다고 하셨다. 언덕에 올라가 닿지 않는 솔가지를 펄쩍 뛰어 간신히 잡아챘다. 그리고 솥에 넣고 삶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또다시 어쩌면 좋으냐고 묻자 영은이 할머니는 들기름을 넣어 솥을 코팅하라고 하신다. 또 물을 비워내고 들기름을 발랐다. 그리고 불을 지피고 면 보에 들기름을 묻혀 솥을 닦아냈다. 그리고 불을 지피고 또 한 번 더 발랐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송진 때문인지 들기름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솥의 물이 맑아졌다. 파지처럼 구겨졌던 내 마음도 말끔하게 펴졌다. 영은이 할머니 말씀대로 솥이 길이 든 것 같았다.

길을 들인다는 것은 오랜 시간의 인내와 수고가 겹쳐져야 하는 일이었다. 가마솥을 길들이는데도 이렇듯 시간과 정성이 드는데, 하물며 삶의 길을 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랴. 살면서 녹슬지 않고 또 삐걱이지 않고, 가고 싶은 길을 가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난 겨울, 연수를 마치자마자 운전대를 잡았다. 글공부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눈발을 헤치고 빠듯하게 도착한 글방 앞, 차 안에서 정신없이 글을 썼다. 그런데 내 글을 보신 선생님께서 가차없이 버리라고 하셨다. 칼날 같은 바람이 가슴을 훅 긋고 지나갔다. 나름대로 열심히 글 밭을 일구었는데, 낙과만 잔뜩 흩어져 있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버리겠다고 했지만 시베리아 벌판에 맨발로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더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의 밭에는 어떤 씨앗이 떨어져 있는 것일까. 글이 될 씨앗이 없는데 난 그것을 키우려 애만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다시 드는 생각. 가마솥을 길들이는데도 수많은 인내의 시간이 걸리는데, 제대로 된 글을 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랴. 겨우 일 년의 세월을 들이고 새 길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이리라.

산다는 것, 길을 내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을 되뇌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과녁 없는 텅 빈 하늘, 아니 어디를 쏘아도 다 맞을 것 같은 전부가 과녁인 하늘이 나를 보며 어서 조준하라 손짓한다. 인생의 과녁에 다시 한 번 시위를 당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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