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만 삭발
겉모습만 삭발
  • 권진원<진천 광혜원 성당 주임 신부>
  • 승인 2017.01.0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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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 권진원

2016년 한해는 끝이 났지만 지난 두어 달의 일들은 계속 진행형입니다. 최근의 사회를 보면서 맘 한켠이 불편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달래려고 토요일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12월 중순 찾아온 독감은 저를 더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축제일 중 하나인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한 켠에선 촛불집회의 아우성이 잦아들지 않고 있고 다른 쪽에선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환호가 가득한 가운데 저는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성당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기도 해야 하고 대한민국의 국민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 하야와 퇴진을 소리쳐야 하는데 독감의 기세는 그칠 줄 모르고 괴롭히는 가운데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성탄 전야 행사를 준비하면서 거울 앞에 섰습니다. 문득 머리카락을 삭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바리캉을 들고 머리카락을 밀면서 혹시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원빈처럼 보일까 했더니 그냥 산적 한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열흘간 기른 수염과 함께 말입니다. 몰골을 보아하니 어디 산에서 도를 닦고 내려오거나 산짐승을 때려잡을 듯한 모습에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맘이 편치 않을 듯하여 머리카락을 자르긴 했지만 왠지 괜한 짓을 한듯했습니다. 성탄 전야의 축제일에 삭발한 모습을 드러내고 신자들을 만나니 다들 의아해하며 수군수군 거렸습니다.

삭발은 흔히 불교에서 스님들이 하는 수행자의 모습인데 머리카락을 무명초(無名草)라 하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 자신이 버려야 할 것을 잘라내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데 전 그냥 충동적으로 저의 의지와 신념을 보여주려 한 것이어서 수행자들께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겉모습을 급격하게 바꾸는 것은 심정의 변화가 클 때나 일어나는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주위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 시선과 관심을 끌게 되고 대단한 의지와 결심을 보여주는 듯 의미부여를 해주는 말들에 의기양양해하는 저를 보고야 말았습니다. 단순히 답답한 맘을 표현하려고 깊은 고민 없이 한 일이 대단한 일을 한 듯 되돌아오니 저는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구름에 뜬 기분으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새해가 되었고 어느 날인가 거울 앞에선 저를 보았습니다. 삭발한 모습과 사람들의 치켜세워주는 말에만 정신이 팔려 세상 일에 정말로 함께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같이 소리쳐주지 않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끝을 보이지 않는 괴로움을 당하는 세월호의 가족들은 이제 참사 1000일을 앞두고 있고 대통령 퇴진을 소리치던 광화문의 군중 또한 1000만명을 넘어선 이 상황에서 겨우 삭발을 한 것으로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맘을 조금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이 삭발의 의미에 부합하는 저 자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위정자들인 바리사이들을 향해 잔과 접시는 깨끗이 하지만 속은 깨끗하지 못함(루카복음 11장 39절)을 나무라듯이 이제 겉과 속 모두를 잘 갖추어 세상을 살아가려 합니다.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해야 했던 맘 속에 있던 욕심과 자랑거리,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등 이 모든 허위들을 이제야 잘라내려 합니다. 이제 그만 어깨의 힘을 빼야 하겠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걸맞은 내 속마음이라야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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