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숲해설사>
  • 승인 2017.01.0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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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안상숲<생거진천휴양림숲해설사>

어둠 속을 헤치고 산을 올랐습니다. 새해, 처음 해가 뜨는 날이기에 그랬지요. 많은 사람으로 모처럼 숲 속은 들썩였어요. 아마도 숲 속의 동물들이 화들짝 놀랐거나, 혹은 겨울잠에 든 곤충들의 꿈자리가 뒤숭숭했을 거예요.

어둠 속에서도 익숙한 산길입니다. 일 년을 하루같이 오르던 산길, 임도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보나 마나 고욤나무가 섰고 오래된 살구나무가 있을 테지요.

바위들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어요. 풀대궁위에 잠자리 한 마리 앉았다가 날아간 것까지요.

잣나무 숲에 들어섰을 때에는 싸늘한 새벽공기에 실린 잣나무 향이 내 심신을 말끔하게 헹궈주는 것 같았습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숲이 온전하게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어둠 속이라 숲 속 생명들의 숨소리까지 들렸지요.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에는 멀리 첩첩한 산맥이 흐릿하게 보일 만큼 새벽이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입니다. 안성의 칠장산에서 시작된 금북정맥이 가로로 구불구불 펼쳐졌습니다.

산은 빛바래 산인 듯 하늘인 듯 그 경계가 불분명했어요. 가끔 한 무리의 새떼가 이 봉우리에서 건너 봉우리로 날아갔습니다.

곧이어 해가 떠오르려는지 구름 사이가 붉게 물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막 떠오르려는 해로 집중합니다. 붉은 해가 눈썹만큼 보일 때에는 여기저기에서 환성이 터졌지요.

새것인 해, 처음 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거의 신앙 같았습니다. 무엇이 이토록 해에 열광하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요. 물론 해를 맞이한 내 마음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기에 말입니다. 마음이 벅차올랐고 터질 것 같았고 해의 기운으로 가득 충전되었지요.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바람들을 소리 없이 뇌었습니다. 기도입니다. 가족들의 건강과 아이의 진로와 그리고 덧붙여 조류독감으로 대량 살 처분된 수많은 짐승에 대해서도 기도했습니다. 다만 올 한 해 내 손끝과 발끝에서 죽어지는 생명이 없기를 또한 기도했습니다. 조금 더 너그럽겠다는 다짐이 기도 끝에 새겨졌지요.

새해라지만 어제의 해와 달라진 건 없을 터이니 새것은 정작 해가 아니라 내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이 새로워진 것이지 해가 그런 건 아니겠지요. 몇백 년을 산 나무에서도 봄마다 아가 손 같은 새순이 돋아나는 것처럼, 그렇게 봄마다 순결해지는 것처럼 나 또한 어느새 둥그렇게 떠오른 해 앞에서 묵은 것들을 훨훨 헹구어낸 순결함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한참을 정물처럼 서서 오래도록 해만 응시했습니다. 다행히 흐린 탓에 해를 정면으로 바라봐도 눈부시지 않았지요.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게 바라보자니 마음속까지 온기가 번지고 격정이 잦아들며 평온해졌습니다.

잠깐, 무엇이 해에 기도하게 하는가 자문했지만 그건 아주 간단한 물음이었습니다.

나무와 풀, 땅 위의 것이거나 하늘의 것, 물속의 것까지 지구 상에서 숨을 쉬는 모두는 해가 아니었다면 애초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니까요. 해는, 우리 생명의 원천입니다. 기원입니다. 신앙이고 토템입니다. 그러니 해를 향한 우리의 향일성은 신실한 신앙심이며 감사기도입니다. 살아있는 우리 모두의 유전자에 처음부터 깊이 저장된 신앙인 것입니다.

해의 기운을 가득 안고 돌아오는 길이 환해졌습니다. 해에 드린 기도 덕분에 나는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새해 첫날이 충만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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