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擧必書 書法不隱(군거필서 서법불은)
君擧必書 書法不隱(군거필서 서법불은)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7.01.02 20: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데스크의 주장데스크의 주장
▲ 이재경 국장(천안)

충남 예산 출신으로 인조, 효종 때 궁중에서 의관을 지냈던 이형익(생몰년 미상)은 어지간히 명줄이 길었다. 두 번이나 세자와 왕을 의료사고로 죽인 혐의를 받고도 살아났다.

번침(燔鍼·불에 달궈 놓는 침)의 달인으로 불렸던 그는 인조 23년(1645) 소현세자가 귀국 직후 사망하자 입궐 후 첫 번째 탄핵을 받는다.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세자의 사인을 이형익의 오진으로 보고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

 `오한이 심해 몸이 떨리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을 놓았다'는 것이 탄핵 사유였다.

당시 왕이나 왕자, 공주가 병사하면 의관들은 이렇다 할 잘못이 없어도 국문을 당하는 게 관례였으며 더구나 독살설이 퍼져 있던 상황이라 중형은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왕은 끝내 이형익을 감싸고 처벌하지 않았다. 인조 그 자신이 소현세자를 독살한 장본인으로 의심받던 상황을 감안하면 당연한 처사였을 지도 모른다.

두 번째 탄핵은 5년 후 인조가 사망했을 때다. 그는 인조가 죽기 전에 몇 개월 간 매일 침을 놓았다. 이후 인조가 최후를 맞자 사헌부는 `이형익이 혈(穴)을 잘못 짚어 대왕께서 승하했다. 안율정죄(按律定罪, 사형)가 마땅하다'며 또다시 그를 탄핵했다.

그러나 효종은 이형익이 선왕에게 충직했던 어의였던 점을 고려해 정작 죽이지는 않았다. 함경도 경원에 유배를 보냈다가 2년 후(1651) 다시 특사로 궁궐에 복귀시켰다.

이 와중에 불똥은 엉뚱하게 승정원(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으로 튀었다. 탄핵 상소를 왕에게 전한 승지 정유정이 파직을 당한 것이다. 파직 사유는 상소문의 글귀를 제멋대로 첨삭했다는 것. 그는 사헌부의 상소 내용 중 `안율정죄'에서 안율을 빼고 `정죄'만을 써넣어 왕에게 전했다. 안율정죄는 죄를 엄히 규율대로 다스려 사형에 처하라는 뜻임에 반해 정죄(定罪)란 `죄를 벌하라'는 정도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뒤늦게 상소 내용이 축소 보고된 점을 알게 된 효종은 즉시 파직을 명했다. 여론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았다며 중벌로 다스린 것이다.

당시 정유정의 직책은 정3품 급의 승지, 직급은 낮았지만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수석 비서관의 신분이다. 그런 그를 단칼에 내쳐버렸다. 의료사고를 낸 이형익에 대한 탄핵은 받아들이지 않은 효종이 탄핵 상소의 문구를 제멋대로 고쳐버린 비서관을 엄벌한 사건. 조선시대 왕들이 여론 수렴과 왕명 출납을 관장하는 승정원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다.

위 사건은 모두 승정원일기에 세세히 적혀 있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승정원일기는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기록한 세계 최대 규모의 역사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300여년 간 왕의 언행과 동선을 사실 그대로, 매일 시간대별로 기록한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찬란한 유산. 역시 우리 최고 유산인 조선왕조실록도 이 승정원일기에 기초해 집필됐다.

군거필서 서법불은(君擧必書 書法不隱·임금의 모든 행동은 은폐하지 않고 반드시 기록한다). 승정원일기를 쓴 당시 사관들의 신념이자 철학이었다.

기록은커녕 기억조차 애써 지워버리려고 하는 청와대 비서관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