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현주<수필가>
  • 승인 2017.01.0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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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전현주

시어머님이 버스에 오르신다. 차창 너머에 계신 어머니는 어제 마중 나와 뵈었을 때보다 더 작아 보인다. 밝고 거침이 없던 어머니의 모습이 이제는 어렴풋하다. 내가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당신 멋대로 가구의 위치를 바꿔놓거나, 이 구석 저 구석 들여다보시는 통에 마음이 분주했던 것이 불과 몇 해 전이다.

결혼을 앞두었을 때 친구들은 연로한 시부모님과의 갈등을 이야기하며, 젊고 아름다운 나의 시어머님을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시어머니와 잘 지낼 자신이 있었다.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내가 그분과의 동거를 만만하게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 역시 그분이 아직 젊다는 것뿐이었다.

어머니와 내가 살림을 합치던 날, 어머니는 닫혀 있는 문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니 서로 문을 열어 놓고 살자는 어이없는 말씀을 하셨다. 설마 했지만 정말 놀랍게도 그분의 방문은 늘 열려 있었다. 마치 본디 문의 용도를 모르는 사람처럼 집안의 문이라는 문은 다 열어 놓으셨다. 내 전부를 노출한 채 지내는 동안 나는 늘 불안했다. 어쩌다 슬그머니 문을 닫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문 뒤의 세상은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고작 한 치 두께의 나무문이 그토록 놀라운 기능을 가졌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닫힌 문은 자유였다.

그러나 잠시 후 어김없이 어머니가 부르셨다. 다급한 음성에 놀라 뛰어 나가보면 저녁 찬거리로 무엇이 필요한지 정도를 묻는 사소한 용건이었다. 그리고는 문을 그렇게 꼭 닫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어느 날 형님이 오시자 어머니는 슬그머니 딸의 손을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부침개 쟁반을 들고 어머니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주뼛거렸다. 그날 어머니는 다 식어버린 음식이 몹시도 못마땅하셨던 모양이었지만, 나는 오직 어머니만이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는 문이었다는 사실이 더 서운했다.

그날 이후 나도 문을 닫았다. 이제는 문밖에서 부르셔도 급히 달려나가지 않았다. 내 자유는 위태로웠으나 완강한 나의 문에 대해 어머니도 굳게 입을 닫으셨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퇴근이 늦은 남편은 밤마다 어머님께 붙잡혀 끝내 우리 방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매일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남편은 문을 빠끔히 열어 얼렁뚱땅 인사를 하고는 마치 나를 위해 큰 배려라도 해주는 양 문밖에다 잠자리를 폈다.

그 해의 마지막 날 밤 거실의 TV에서는 새해를 알리는 초읽기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는 다정한 모자의 덕담과 웃음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들은 나를 잊었다. 나는 스스로 닫은 문 뒤에 갇혀 버렸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어머님의 해묵은 쓸쓸함을 눈치 챈 것도 바로 그때였다.

문으로 인한 실랑이는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보다 훨씬 강력한 상대가 등장한다. 아이는 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를 제 눈앞에만 두려고 했다. 엄마가 잠시만 안 보여도 자지러지게 울며 이방 저 방을 찾아 헤맸다. 우리는 아이가 문틈에 손이라도 찧어 다칠까 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급기야 화장실 문에 매달려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단 하나 남겨두었던 마지막 문까지 기쁘게 열어젖혔다.

어젯밤 딸아이 방에 어머님의 잠자리를 봐 드리고 나오며 방문을 반만 닫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문을 열어 놓고 산다. 이제 어머니와 나 사이의 문에는 보이지 않는 말굽장치가 달렸다. 바람이 불어도 느닷없이 꽝 소리를 내며 닫히지 않을 믿는 구석이 생겼다. 아이들이 방문을 닫으면 나는 천진한 얼굴로 묻는다. 문을 그렇게 꼭 닫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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