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흔적
  • 정명숙<수필가>
  • 승인 2016.12.29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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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정명숙

어젯밤, 감기로 인해 밤잠을 설쳤다. 늦잠에서 일어나 서성거리다 창문 너머 숲을 봤다. 나무들이 헐벗을수록 바람은 숲을 지배하는 힘이 커지나 보다.

앙상한 잔가지가 대책 없이 흔들리고 그 위로 흰 눈 몇 송이 날린다. 벽난로에 장작을 넣으며 겨울 숲의 적막과 마주한다.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은 나무가 한 해를 살아낸 흔적이다. 스산한 풍경에 바람 한 줄기, 가슴 속으로 길을 내며 달린다.

흔적을 남기고 떠난 것들이 낙엽뿐이던가. 현재는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추억이 되어 다시 되돌아온다. 풍화를 기다리는 낙엽에도 추억은 있으리라, 잎을 틔우던 봄날의 설렘, 비와 바람과 햇살에 푸르게 반짝이던 여름날, 가을의 황홀한 단풍의 향연이 그러했을 것이다. 깊은 상념을 깨려는 듯 밝은 햇살이 여백의 숲 속으로 내려앉는다. 며칠 만에 온 청명한 날이다. 걷고 싶은 충동에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두툼한 옷을 입고 모자를 썼어도 몸이 움츠러든다. 한해의 끝자락에 제대로 추위가 왔다. 길가의 마른풀들 위로 잔설이 쌓여 있다. 그 속에 민들레 노란 꽃이 활짝 핀 채로 얼어 있다. 추위가 풀리면 꽃도 다시 소생할까, 예년보다 포근했던 날씨가 꽃의 생사를 갈라놓았다. 청춘의 죽음이다. 나는 조용한 소리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본다. `앤드류 보일'그는 우리에게 많은 흔적과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놓고 서른 살 청춘에 말기암으로 떠난 작은사위다.

저무는 날들은 나에게 많은 흔적을 남겼다. 왠지 행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듯한, 위로받고 싶지만 딱히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일들이었다. 아끼고 사랑했던 사위와의 사별은 말문을 닫게 하는 아픔이었다. 세상을 떠난 정인 곁에서 슬픔에 젖어 있는 딸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은 지금도 타들어간다. 6년이 넘어서는 시부모님의 병수발이 가끔 심신을 지치게 하고 피붙이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벌어지는 서운함도 자식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힘겨운 현실을 벗어나게 한 건 큰딸의 출산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므로 말문이 트이고 웃음이 번졌다. 낙엽만 쌓여 있는 듯 무거운 침묵만 흐르던 집안에 노란 싹이 돋고 졸졸거리며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봄이 찾아온 것이다.

아이는 모든 어려움을 덮고 그 위에서 별처럼 반짝이며 재잘댄다. 아이의 움직임은 곳곳에 흔적을 남겨 소중한 추억으로 만들어 준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게 인생살이라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이젠 내 몸에 나이테 하나를 더 늘리고 한해가 간다. 새로운 한해가 온다는 것은 훗날 아프지 않을 추억을 만들어갈 기회가 온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나는 찬바람을 맞닥뜨리며 마주친 풍경들, 새와 나무와 들판과 산, 구름과 바람을 만난 때마다 습관처럼, 내게 흔적을 남기는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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