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기억, 이름 기억
얼굴 기억, 이름 기억
  • 정세근<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6.12.2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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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 정세근

얼마 전에 한의대에서 연합학회가 있었다. 그곳 학장이 거금도 내놔서 즐겁게 보낸 하루였다. 그 친구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다.

몇 년 전 창녕 성씨 고가에서 1박 학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쪽에서 포도주를 내놔서 학회 후 취중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얼굴이 익는데도 도대체 어디서 만났는지 떠오르지 않는 거다.

술 한 잔 먹은 김에 `우리 아는 사이니까 따져봅시다'고 말을 던졌고, 위부터 따지기 시작했다.

유학도 아니었다. 대학은 그 친구는 한의학을 했고, 나는 한의대가 없는 곳에서 철학을 했으니 만날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따져도 지역조차 달랐다. 아래로 내려가다가 드디어 찾아냈다. 초등학교 동무였던 것이다.

나는 그 학교에 다니다 전학을 갔는데 그때 어울려 놀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는 `당신 얼굴 안다'고 주장만 했는데 그 친구는 `너, 세근이 아냐!'고 내 이름을 뱉어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 이름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그 친구 얼굴을 기억한 것이고 그 친구는 내 얼굴을 완전히 잊어버렸지만 내 이름을 기억한 것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저 둘이 뭐하나 했더니, 초등학교 친구라니! 한마디로 `족보 털기'하다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이었다. 우리 둘의 이야기는 다음날도 화제가 되었다.

만일 내가 그 친구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상봉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고가 측에서 술을 내놓지 않았다면 나도 말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빼자. 술 한 잔 먹은 김에 용기를 내서 분명히 아는 얼굴이니 어디서 알았는지 따져볼 정도로 나는 그 친구의 얼굴에 확신을 했다.

생긴 것은 그 친구가 들으면 화내겠지만 개성 없는 그저 평범한 얼굴이다.

그래서 시작했지만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초등학교 이름이 나오자마자 어떻게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었느냐는 말이다.

기억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미지를 기억한다. 중학교 때 배운 피타고라스 정리도 칠판에 증명하는 것이 떠오르지, 수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직각삼각형에 정사각형을 붙이고 줄 쭉 긋고 증명하는 거 말이다. 수학도 공식을 외우는 데는 젬병이었지만 그림을 떠올리는 데는 소질이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장면으로 사람을 기억한다. 대신 사람 이름 외우는 데는 정말 자신 없다. 학생들이 이름을 기억해줘서 고맙다고는 하지만, 그건 장시간 노력의 산물이지 자연스럽게 얻어지지 않는다. 잊는 것도 금방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사람을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적극적으로 나를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우겨서 앞뒤를 따져봤던 것이지만, 그 초등학교 이름이 나오자마자 내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사건의 실마리를 푼 것은 나지만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그 친구는 당시 친구들 이름을 다 대고 있었다. 나야 떠나와서 모른다지만 떠나온 나까지 기억해주다니.

20년 전 초등학교 한 친구가 떠올라서 공연히 20년 만에 그 친구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는데, 웬 사내가 나오더니 `세근이 형 아니예요?'라는 인사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친구 동생이었다.

난 전혀 모르겠는데 말이다. 얼굴 조심하며 살아야겠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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