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아래에 서다
겨울나무 아래에 서다
  • 이창옥<수필가>
  • 승인 2016.12.27 1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큰딸이 남자 친구를 데려왔다.

내가 본 녀석의 첫인상은 합격이다. 인물도 훤칠하고 허우대도 튼실하니 보기 좋았다.

취업준비생들로 넘쳐나는 어려운 시절에 국방의무까지 마치고 직장까지 다니고 있으니 별로 흠잡을게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녀석이 우리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정성스러웠다. 그러니 특별하게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녀석을 돌려보냈다.

그 이후로 우리 부부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녀석이 남기고 간 흔적을 두고 통속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딸아이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짝이 되기를 내심 바랬다.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 지척에 두고 딸아이가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딸에게도 종종 내색했다.

그럼에도 딸아이와 녀석에게는 물리적인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물고물 하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제짝을 찾아 데려온 것이 신기하고 대견하다.

한편으로는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때가 가까이 온 것 같아 서운한 마음에 괜한 트집을 잡아 아이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딸아이가 눈치 없이 내 앞에서 녀석의 편을 들라치면 얄궂게도 그 녀석보다 딸아이가 더 얄미워지는 것이었다.

그 옛날 나를 바라보던 친정엄마 마음이 이랬을까 싶어 자꾸만 헛웃음이 나온다.

요즘 딸을 바라보는 내 심정이 오락가락 갈피를 잡지 못하고 널을 뛰고 있다.

아무래도 얄궂은 속내를 달래려면 겨울 숲에라도 다녀와야 할 듯하다.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나무들은 어느 계절 어떤 곳에 있든지 아름답지 않은 나무는 없다.

긴 엄동설한을 이겨낸 후 새싹을 올리는 봄의 나무는 새 생명의 잉태를 바라보는 양 경이롭고 설렌다.

울울창창하게 녹음을 뽐내는 여름의 나무는 또 어떠한가. 그 푸른 물결나무 아래 서 있기만 해도 온몸으로 초록 물이 흘러들어 절로 청춘으로 회향할 것 같지 않던가. 봄여름을 이겨낸 가을나무의 풍요로움과 찬란함은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럼에도 어느 날부터 겨울나무를 바라보는 일이 좋아졌다. 가진 걸 다 버리고 매서운 삭풍에 알몸으로 견디는 겨울나무 앞에 서면 그 초연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바람결에 빈 가지를 비비며 휘파람소리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나무들이 모여 사는 12월의 겨울 숲은 더욱 좋다.

이제 내 나이도 마음을 비워낼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무 아래에 섰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았다.

다른 계절에는 경험하지 못할 나무 아래서 바라볼 수 있는 하늘 풍경은 욕심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겨울나무가 주는 의미 있는 선물이다.

그동안 무심하게 바라보기만 하던 나무였다. 그 겨울나무가 비우고 내려놓는 지혜가 필요할 때가 되었다고 나에게 바람 소리로 속삭이고 있다.

그 아이도 그 아이 부모에게는 금쪽같은 자식일터, 더 이상은 녀석을 통속적인 잣대로 저울질하지 않으리라. 이제는 나도 남편도 딸아이를 품에서 내려놓을 때가 되었나 보다.

텅 비어 버린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하늘을 보았다. 겨울 하늘이 푸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