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선물하다
고통을 선물하다
  • 이은희<수필가>
  • 승인 2016.12.2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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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은희

나이 드신 분들은 입버릇처럼 고통 없이 이승을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정토마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말기 암 환자를 보며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몹쓸 짓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이승을 떠나기 어렵고, 간호하는 사람도 그 곁에 머무르지 못할 정도의 악취가 난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그 순간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라고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얼마 전 내 생각을 뒤엎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지인이 바람처럼 흘린 말이 내 가슴을 찌르고 달아난다.

어느 기자가 소록도에서 오랜 의사 생활을 마친 그에게 나병환자 분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느냐고 물었단다.

의사는 그들에게 `고통'을 선물하고 싶다고 한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부족한 시설이나 의약품 정도를 떠올렸으니 알 리가 있으랴.

그는 왜 하필 하고많은 선물 중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문득 한하운의 시(詩) 구절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래서였으리라.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손가락 한 마디>중에서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 또 한 개 없어졌다.”

-<전라도 길>중에서



나병은 손가락 발가락 마디가 끊어지는 감각을 모른다. 통증 없이 마디가 바닥에 떨어지는 상태, 정말 기가 막힐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고통은 더 크리라. 인간은 누구나 정신과 육체의 병을 앓거나, 노병으로 죽어간다. 그런데 사람들은 병증이 크든 작든 고통을 참다못해 `죽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한다. 아니 자신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 중에 하나가 아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가 떨어져 나갔다'라는 시구를 만나면, 그 말은 입속으로 쏙 들어가 맴돌고 있으리라.

고통 없는 병이 제일 무서운 것 같다. 그리 보면 고통은 살아있음의 증거가 아닌가. 하물며 잔디밭에 잔디를 깎을 때 풀향이 짙게 흐르고, 나뭇잎 또한 쌉쌀한 향기나 바스락 소리를 낸다. 우주만물이 아니 대자연이 곁에서 그 이치를 말하는데, 나만 우이독경(牛耳讀經)이 아니던가.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살아 숨 쉬는 모든 물상은 고통과 더불어 생(生)의 한순간을 지나 바람처럼 죽음에 다다르는 것을.



“잘난 청춘도 못난 청춘도/ 스쳐가는 바람 앞에 머물지 못하며… 우리네 인생도/ 바람과 구름과 다를 바 없는 것을.” 라고 경허선사가 말했던가. 바람처럼 흘러가는 게 인생이란다. 나도 훗날 바람처럼 떠날 즈음, 어떤 향기를 남길지 자못 궁금하다. 나날이 소멸로 가는 중이니, 참으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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