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산
두타산
  • 박경희<수필가>
  • 승인 2016.12.25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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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박경희

진천에 두타산이 우뚝 솟아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타(頭陀), 말 그대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의 뜻이거나, 떠돌면서 온갖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는 일. 또는 그런 승려를 지칭하는 두타산은 본래의 뜻이 무색하지 않다.

천년 고찰 영수암이 그 산의 품 안에 깃들어 있음은 두타산이 진천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위안이다. 두타산에는 하늘의 이치를 닮은 돌탑이 군데군데 자리를 차지하며 세상사 하늘의 이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어디 그뿐이랴. 산 능선 곳곳에 우뚝 서서 위용을 자랑하는 통신탑과 방송 중계탑은 머지않아 이곳이 지구촌 정보통신의 요람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맞닿아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기막힌 필연이 될 것인가.

두타산은 정상의 높이가 598m로 `두태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진천의 동쪽에 병풍처럼 솟아 진천군에서는 가장 먼저 새벽을 맞는 두타산은 마치 부처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면서 영수암을 산자락에 품고 있는 명산이다. 진천군 상산팔경 중 하나인 영수암은 918년(태조 원년) 중통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초평면 영구리 절 뒤편에 신비로운 영천(靈泉)이 샘솟고 있어 영수사(靈水寺)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는 대웅전 앞의 3층 석탑과 영수암 괘불(보물 제1551호)이 있다. 두타산은 그 지명 유래가 단군신화와 어우러져 있을 만큼 한반도 중심의 전설처럼 자리하고 있는 산이다. 먼 옛날 한민족 시조 단군이 팽우에게 높은 산과 냇물 등 산천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비가 날마다 내렸고, 산천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높은 곳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팽우가 이 산에 머물자, 산꼭대기만 섬처럼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일을 겪은 이후 두타산은 머리 두(頭) 섬 타(陀)를 써서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산행은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에서 영수암이라는 표지판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영수암에서 동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증평읍과 진천읍 북쪽과 동쪽의 바둑판 같은 넓은 뜰이 한눈에 들어오며, 아래로는 초평저수지가 내려다보인다.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앃은 것으로 알려진 석성이 있고 부근에는 황금빛 갈대밭이 무성하다. 산성의 규모는 높이 1.2m, 너비 2.7m, 성 둘레 약 1km이다. 성터에는 돌무더기가 오랜 비바람에 검게 그을려 있고, 안에는 성재(聖裁)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두 개의 우물터가 있다. 신라시대의 장군 실죽이 백제군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편, 기왓조각 등과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두타산에는 돌탑이 많다. 두타산에 돌탑을 쌓은 이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 노인이다. 이미 칠순의 나이에 접어든 때 처음 돌탑을 쌓기 시작한 그 노인은 지금 하늘의 별자리를 닮은 돌탑을 쌓아 올린 뒤 자신은 물론 두타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신선이 되는 길을 손짓한다.

그 노인은 한때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두타산 영수사를 찾게 되었고, 한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렇게 해서 돌탑을 쌓기 시작하는데, 크고 작은 돌들을 모아 탑을 쌓으면서 안에 있는 욕심을 비워내고, 또 자신을 낮추며 세상 사람들을 위한 마음을 닦아 나간다. 지금까지 그 노인이 두타산에 쌓은 돌탑은 모두 28기이다. 이제 28기의 돌탑은 우주의 28 별자리와 맞닿아 하늘을 닮아가고 있다.

두타산에는 방송사 중계탑과 통신탑이 여러 개 있다. 돌탑과 함께 철탑이 두타산에 있고, 그 두타산이 진천에 깃들어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진천 넓은 들에 혁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정보통신의 요람이 되고 있음은 두타산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신비스러움이고 영험이며, 필연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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