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민사(忠愍祠) 1
충민사(忠愍祠) 1
  • 김홍숙<괴산군문화해설사>
  • 승인 2016.12.25 1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 김홍숙

“나는 충의를 맹세하고 진주성을 지켜 국가 중흥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 싸우면 천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나를 따르는 자 살 것이며 도망하는 자 멸할 것이니 감히 도망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나의 엄지는 이미 떨어지고 식지와 장지로 활을 당긴다. 남은 세 손가락마저 떨어질 때까지 싸우리라. (임진년1592 10월 초 김시민)

윗글은 천안 독립기념관과 진주박물관에 있는 김시민 장군의 동상 아래 쓰여 있는 글이다.

괴산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명장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그의 숙부이신 문숙공 김제갑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 하는 사당이다.

김시민(1554~1592)의 자는 면오이고 본관은 안동이며 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을 크게 격파한 공로로 진주 목사가 되었다. 연이어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왜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조정의 사기를 높여주어 영남우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92년 10월 왜군 3만 명은 1차로 진주성을 공격하여 아군 3800여명과 대접전이 벌어졌는데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왜군 2만 명을 사상케 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역사에 찬연히 기록되었으며 이로써 진주대첩은 호남 호서 지역으로 진격하려던 왜군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진주성 1차 공격의 참패는 일본으로서는 임진왜란 기간 중 가장 치욕적인 패배로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한다. 장군은 왜군의 이동 경로를 감지하고 이미 병기를 수리하고 성을 구축시켰으며 수성군을 모집하여 `진주성을 사수하자' 며 맹훈련을 시켰다 한다.

소수병력으로 대병을 맞아 필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성 밖에 있는 의병들로 하여금 산발적인 적 측 후방공격 및 교란작전, 횃불 시위 등을 전개하여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적군의 혼란을 유도하였다.

또한 성안의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장하여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였으며 밤이면 악공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여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무기로는 차대전, 현자총통, 질려포, 화약 등 당시 조선의 신식 무기들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장군은 전투에 대비하여 염초 510근과 총통 70여 자루를 만들고 재능이 있는 자를 선별하여 총 쏘기 연습을 시켰고 화약을 짚으로 싸서 던지게 하였다.

물을 끓여 성으로 오르는 적에게 붙고 잡혔던 민간인을 통하여 적정을 소상히 파악했으며 성민들이 돌과 기와, 짚단을 가져와 투척하며 민, 관, 군이 총력전을 전개하여 승전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김시민 장군은 왜군이 조총을 주 무기로 3개 부대로 나누어 공격해 오자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기 위해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하였다.

직접 성내를 순회하여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군림이 아닌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고 솔선수범하여 군사들이 감복하여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릎 쓰고 싸우게 되었다고 한다.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술로 3만명 대 3800에서도 승리한 전쟁이었다. 전쟁 9일째 되던 날 일일이 점검하던 장군은 순시를 나갔다가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병의 총탄에 운명하였다. 장군은 떠났으나 이긴 것은 침략자가 아니라 끝까지 싸우다 죽어간 조선인의 기백이요 혼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 역사에 민족을 지키려는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그 정신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숭고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