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가 보고 싶어
환희가 보고 싶어
  • 김기원<시인·문화비평가>
  • 승인 2016.12.2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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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

환희는 제 3세 이름입니다.

왜 환희냐고요? 희(熙)자 돌림이기도 하지만 손자를 본다는 게 너무 기뻐서, 집안에 기쁨을 몰고 와서, 세상과 살아가는 인연들에 기쁨이 되라고 이름을 `환희, 김환희'라고 지어줬죠.

며칠 전 아들 내외가 네 살배기 손녀 별과 환희를 데리고 청주 할아버지 댁에 왔어요.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처음으로 할아버지 댁에 온 거지요.

태어날 때 병원에서 첫 대면한 후 인천 아들네 집에 가서 환희를 안아보긴 했으나 내 집에서 환희의 재롱을 볼 수 있다는 게 마냥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축복처럼 환희 백일 맞이 의식을 치렀습니다.

백일잔치라야 거실에서 이벤트사에서 렌트한 상차림과 아내가 정성들여 준비한 백일떡을 놓고 환희에게 렌트한 옷과 모자를 입히고 씌워 기념사진 찍어주는 게 전부지만 말입니다.

덕분에 모처럼 집안에 온기가 돌고 웃음꽃이 만발했습니다.

웃음꽃 중에 으뜸은 단연 환희의 살인미소였습니다.

그 어린 것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얼굴에 엷은 볼우물을 띄우며 어찌나 귀엽게 웃는지, “까꿍`하면 옹알이하며 웃는 환희를 보노라면 세상 시름과 번뇌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평소에 무릎과 허리가 안 좋아 고생하는 아내가 연실 환희를 안고 좋아라 합니다.

그런데 놀 때는 그렇게 귀엽고 예쁜데 잠투정하거나 뭔가 못마땅하면 기를 쓰고 우는 딴사람이 됩니다. 그럴 땐 지켜보는 할애비 마음도 타들어 가고, 달래고 어르는 애미도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릅니다.

낮에는 그런대로 잘 노는 편인데 밤이 문제입니다. 계속 보채고 우는 통에 아들 내외가 숙면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사랑을 독차지했던 손녀 별까지 시샘하며 보채니 며느리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악다구니 쓰며 울다가 잠이 들면 평화가 찾아오고 잠이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방긋방긋 웃으니 그 맛에 아이를 키우나 봅니다.

그렇게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1박 2일을 보낸 환희가 인천으로 돌아간 지 20일이 되어갑니다. 그런데도 환희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손자바리기병에 걸려도 아주 깊게 걸렸나 봅니다.

아들이 퇴근하고 돌아오는 저녁 시간이면 카톡으로 하는 영상통화 때문에 아내와 실랑이를 벌입니다.

환희가 보고 싶어 전화를 걸라치면 아내가 전화를 못 하게 제동을 걸기 때문입니다. 애들 밥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있을지 모르니 전화 걸지 말라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내 손자한테 전화도 마음대로 못하냐'하고 볼멘소리를 하다가 이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맙니다.

아내 말처럼 그럴 수 있겠다 싶어 보고 싶어도 꾹 참습니다.

아들이나 며느리가 환희 컨디션이 좋을 때 카톡을 해주면 좋으련만 바빠서 그런지 힘들어서 그런지 부모 마음을 몰라줍니다.

야속할 때도 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며 삭이며 삽니다.

사실 손주의 첫정은 손녀 별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이지요.

딸이 없어 손녀가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첫정이 깊은 탓입니다.

환희 애비가 어릴 때 찍은 빛바랜 사진첩을 펼쳐보다 놀랍니다.

아들 어릴 때 모습과 환희 모습이 어쩜 그리 흡사한지, 짙은 반곱슬머리 하며 초롱초롱한 눈매와 얼굴이 쏙 빼닮아 피내림의 경이로움에 새삼 경탄합니다.

내 아이 키울 때 몰랐던 내리사랑의 오묘함을 조금은 알 듯합니다.

손주들 손잡고 세계 여행하는 꿈을 꿉니다. 두 아들에게 해주지 못한 사랑과 베풂을 손주들에게 주고 싶어서입니다.

환희가 보고 싶어 오늘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만둡니다.

늙어가는 건지 익어가는 건지 아리송합니다.

/ 시인·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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