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얀 것
그 고얀 것
  • 최명임<수필가>
  • 승인 2016.12.2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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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최명임<수필가>

웃음보가 터지면 참을 수가 없는데 경박한 내 모습이 적나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불씨를 만나 시한폭탄처럼 터져버리는 성싶다.

그날 내 웃음은 유쾌함도 비웃음도 아니었다. 제어장치가 고장 나서 통제 불능인 실소였다. 발가벗긴 내 감정이었다. 그 고얀 것의 악취미에 망신살이 뻗쳤다.

처음엔 그녀의 이야기에 수긍의 표시로 미소를 짓고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눈빛을 주었다. 어머니라는 공통분모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감정을 풀지 못해 여러 해 찾지 않았다.

무엇에 끌린 듯 어머니를 찾은 날 봉당에 천리향 꽃이 진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구나.” 하셨다. 회한과 함께 딸을 향한 그리움을 향기에 실어 보내셨다는 말씀이다. 그 향기에 답해 이리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는 표현이다.

해진 삼베옷처럼 엷어진 감정들이 비껴난 자리에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진하게 채워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아픈 손가락이었던 그녀의 품에서 편안히 떠나셨다.

사연을 풀어가던 말미에 그녀의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눈물 대신 터져 나온 웃음에 아픔이 새록새록 묻어났다. 다른 이들도 웃음바다가 되었는데 감정의 공유일까. 내 웃음이 그만 고얀 것이 되어버렸다.

어이없는 이 감정의 사단에 어찌할 줄 몰랐다. 참아야 한다는 의지가 클수록 웃음은 더 나를 농락했고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차라리 파안대소로 온전히 풀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졌다. 이 난해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어찌 잠재웠는지 모르겠다.

웃음이 가라앉은 후에 후끈한 땀과 함께 몸과 마음이 풀어졌다. 웃음의 효능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 원망스런 웃음도 이완제가 되었다니... 잡다한 감정들이 출구를 만나자 줄행랑이라도 친 것일까. 어혈처럼 뭉쳐있던 스트레스가 덩달아 날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절제하지 못한 내 감정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의 얼굴에 파리가 앉았다. 앵앵거리며 설치는 모습에 냉정해지려 해도 웃음은 얼굴 근육까지 파고들어 실룩거렸다. 그의 곤란함을 즐기듯 내 안의 샐샐거리던 감정하나가 터져 나왔다. 세상이 뒤바뀌는 일은 없을 테니 한바탕 웃어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랬다가는 수천만 시청자를 우롱했다고 질타를 받거나 경망스럽다고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 파리 한 마리로 인해 최소한 징계나 자리를 박탈당할 수도 있겠다.

그녀의 눈물 자리에 나왔던 웃음도, 내 웃음 끝에 눈물도 강한 자정작용과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 솔직한 감정표현은 의술을 능가할 때도 있다.

중도中道가 감정의 조화로움에서 시작된다면 애당초 길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내 작은 그릇에 담기엔 그 수위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제 한 몸 데리고 탈속해도 깨치지 못하고 가는 이 허다한데 미욱한 중생이 번뇌 속에 앉아 중도를 운운하면 그게 어디 쉬운가. 지고 온 업은 죄다 풀어놓고 다시 쌓는 업일랑은 선업으로 채우려 해도 그 길이 가시밭보다 아프다. 더러는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그래도 내 감정 다루기에 마음을 다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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