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 신금철<수필가>
  • 승인 2016.12.2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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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신금철

먹거리를 내어줄 가을 들판을 마지막으로 지킨 건 고갱이를 품은 배추밭이다. 배추밭마저 다 내어주고 가을은 손 흔들며 떠났다. 인간의 욕심으론 감히 따를 수 없는 자연의 비움에 감사 인사를 보낸다. 싹 틔우고 꽃 피워 열매 맺은 알곡과 과일, 푸성귀를 다 내어주고 미련 없이 떠나는 자연 앞에서 끝없는 나의 욕심이 부끄럽다.

가을이 주고 간 마지막 선물인 김장 배추는 곡식이 부족했던 지난 시대엔 꼭 필요한 겨울 양식이었다. 쌀 한 줌 넣고 김치를 듬뿍 넣어 멀겋게 죽을 끓여, 삶은 고구마에 곁들여 먹으면 든든한 한 끼의 식사로 배고픔을 채워주었다. 그나마 김치도 풍족하지 못한 가정에선 이른 봄이면 김치 항아리를 비우며 아쉬워했다.

김장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는 김장 전날이면 배추를 절이느라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다. 고무장갑도 없이 찬물에 절인 배추를 씻는 어머니의 손은 발갛게 부어올랐다. 김치에 들어갈 양념 준비에 며칠 전부터 마늘 까고 파를 다듬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다. 김장을 하는 날,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들과 어울려 정담을 나누고 찰밥을 함께 드시며 웃음꽃을 피우셨다. 김장은 어머니의 연례행사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 여기시고 힘들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의학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주재료로 이용되는 배추 등의 채소는 대장암을 예방해주고, 김치의 재료로 꼭 들어가는 마늘은 위암을 예방해 준단다. 또한 김치에는 베타카로틴의 함량이 비교적 높기 때문에 폐암도 예방할 수 있으며, 고추의 매운 성분은 폐 표면에 붙어 있는 니코틴을 제거해 준단다. 또한 김치는 발효과정을 거치면서 처음 함량의 비타민보다 최소 2배까지 증가한다고 한다. 체내의 당류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므로 당뇨병, 심장질환, 비만 등 성인병 예방 및 치료에 도움을 준다니 김치가 얼마나 좋은 식품인가!

우리나라의 김장은 `김치를 담그는 문화'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유네스코는`김장문화에는 한국인이라는 공동체를 아우르고 고유의 정체성이 깃들어 있으며 가족, 세대, 이웃 간에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자연재료를 이용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일깨워주는 음식문화'라고 평하고 있다.

이토록 우수한 김장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인스턴트식품으로 인하여 김치의 소비가 줄고, 또 바쁜 일상으로 인하여 손이 많이 가는 김장을 하는 일에 대한 기피 현상 때문이다. 김장의 기업화로 공장에서 다량으로 생산되는 김치를 손쉽게 사먹을 수 있다는 점도 그 이유일 것이다.

세대간 명절스트레스로 인한 가정의 불화로 명절 간소화 바람이 부는 데, 이젠 김장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한 갈등도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손쉽게 사 먹을 수 있고 오히려 노동에 비해 경제적일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이 틀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직 손수 김치를 담가 먹는 나에겐 점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절인 배추를 찬물에 씻던 어머니의 고생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나도 김장을 하느라 힘이 들었다. 그러나 김장을 하는 날, 아들 삼 형제와 며느리들이 둘러앉아 양념을 버무리고 김치 속을 넣는 모습에서 가정의 화목과 행복이 느껴져 마냥 보기 좋았다. 겨우내 맛있게 익은 김치와 함께 김장하던 날의 행복도 밥상에 올라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 주리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화도 변한다. 변화는 발전이고 개혁이다. 그러나 전해오는 미풍양속과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것 또한 변화만큼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사라지는 문화를 지키고 이어가기 위해선 세대 간, 남·여 간의 이해와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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