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속임수
사랑의 속임수
  • 김경순<수필가>
  • 승인 2016.12.15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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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김경순

겨울 채비를 마친 겨울나무가 동안거에 들어갔다. 아까울 것 없이 다 버리고 간 빈 나무 꼭대기에 덩그러니 까치집만이 남아 나무와의 동거를 그리워하고 있는 중이다. 나무가 푸르던 지난날에는 보이지도 않던, 아니(보였을 테지만) 눈에 잘 띄지 않던 까치집이다. 바람에도 흔들림이 없는 튼튼한 나무를 골라지었을 터이다. 새끼를 기르기 위한 안식처는 이제 빈집이 되어 바람만이 이따금씩 쉬어가고 있다.

까치의 집은 암수가 함께 집을 짓는다. 수컷이 나뭇가지를 물어 오면 암컷은 진흙과 함께 촘촘하게 얽어서 약 40일에 걸쳐 집을 만든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헌신은 새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떤 부모가 되느냐가 문제이다. 부모 중에는 자녀에게 독이 되는 부모가 있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사랑합니다, 내가 말을 잘 들을 때만.”

우리는 이 공익광고의 카피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혹시 입가에 미소만 지으며 흘려보내진 않았는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모든 자식은 부모에게 아프며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공부를 잘하고, 부모 속 썩이지 않고, 다시 말해 부모의 뜻대로 자라 준 자식이 더 애틋하다. 부모에게 반항하고, 가지 말라는 곳만 골라 가는 자식은 부모에게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다.

미국의 심리학자 수잔 포워드의 저서 《유독한 부모들》에는 자녀에게 독이 되는 부모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아이들을 심판하고 벌주는 부모, 기본적인 양육 의무를 방기 하는 부모들이다. 이러한 나쁜 부모의 양육 방식에 의해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된 후, 고통을 받는다고 말한다. 아이와 부모는 서로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아이의 행동에서 부모의 성향을 알 수 있듯이 부모의 일상의 모습은 아이의 훗날을 결정하게 한다.

개인 가정에서의 부모 역할이 이렇게 중요한데, 한 나라를 대표하는 지도자의 역할은 어떠할까. 지금 우리 국민의 스트레스 수치는 어마어마하게 높다. 그것은 배신감에 따른 결과이다. 자신은 나라와 결혼을 하겠다며 독신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정말 국민만을 사랑하고, 아껴주며 이 나라를 잘 이끌어 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사랑의 속임수였다. 부모가 돼 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자식 같은 국민의 마음을 알겠으며, 라면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서민의 마음을 어찌 알까. 생때같은 수백 명의 어린 자식들이 죽어가는 시간에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하는 어미를 어찌 부모라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미물이라 부르는 날 짐승 중에 하나인 까치도 적으로부터 새끼를 지키고, 강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기 위해 튼튼한 나무를 고르고, 진흙과 나무를 구하기 위해 수천 번의 비상도 마다했을 것이다. 부모는 그래야 한다. 이 겨울, 까치집은 덩그러니 높은 나무 위에서 성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침묵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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