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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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홍영 청주 상당 노인복지관장(신부)
  • 승인 2016.12.1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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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 송홍영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신부)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올 한해를 돌이켜 보다가 문득 어렸을 적 추억이 하나 생각납니다. 괴산 불정면에서 조부모님, 부모님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워낙 어렸을 때라 많은 기억이 남아있진 않지만, 유독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집 뒷마당에는 펌프가 하나 있었습니다. 할머니나 어머니께서 부엌일에 필요하다 하시면 집안의 남자 어른들이 펌프에서 물을 길어 부엌까지 옮겨 주셨고, 여름이면 지친 모습으로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께서도 펌프에서 물을 받은 뒤 형이나 저를 불러 등에 물을 끼얹게 하시며 “아이고 시원하다. 아 살 것 같네!”라며 더위를 식히셨던 기억이 납니다.

제 나이 여섯 살쯤 되었을까요? 하루는 그 작은 펌프라는 물건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따라해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 어렸기에 거의 펌프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열심히 펌프질을 해봤지만 물은 한 모금도 나오지 않고, 깊은 곳에서 끄억 끄억 소리만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줄달음쳐 가서 “할아버지 우리 집에 이제 물이 다 떨어졌나 봐요.”라며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씀드리자 할아버지께서는 껄껄 웃으시며 “어디 한번 가서 보자!”라고 말씀하시며, 제 손을 지그시 잡아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펌프에 물을 한 됫박 부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땅속 깊이 있는 물을 끌어올려야 하는 펌프에 되려 물을 붓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내 할아버지께서 몇 번 펌프질하시자 다시금 물이 콸콸 흘러나왔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펌프에 넣으셨던 그 물이 `마중물'이라는 것을…. 땅속 깊숙이 있는 물들을 마중 나가서 세상 밖으로 끌고 나오는 마중물이라는 것을요.

우리도 무언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에게 있어 소중한 그 무엇을 먼저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간이든 정성이든 금전적인 것이든. 그 어떤 노력이든 간에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으면서 더 좋고 더 큰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허황된 욕심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올 한해를 살면서 저는 이 마중물처럼 무엇을 내어 주고, 무엇을 내려놓으며 살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욕심낸 것이 있지는 않은지 한 해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다가올 새해를 마중 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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