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동백꽃처럼
겨울 동백꽃처럼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6.12.13 17: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가지마다 탐스러운 동백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꽃 천지다. 제주 동백 수목원에 들어서자 꽃그늘에 묻혔다. 선홍빛 피바다, 동백꽃 무리를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여인의 붉은 입술을 포개어 놓은 것처럼 동백은 꽃봉오리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어찌 저리도 고울까. 약속이라도 한 듯 한겨울에 피워 올린 꽃이 대견하여 가슴 뭉클해진다.

이곳 광활한 부지에는 6천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붉은 꽃이 한꺼번에 피어 요란스럽다. 혹한에 상상도 못할 진귀한 풍경이다. 지금 나는 자연이 주는 특별한 선물, 꽃의 향기를 맡으며 꽃길을 걷고 있다. 산수화처럼 펼쳐지는 꽃들의 장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사람들이 왁자하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노부부가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걷는 모습이 정겨운 꽃무리다. 꽃 속에 묻혀서 꽃처럼 웃는 얼굴들, 나도 그들처럼 화사하게 표정을 담는다. 마음은 꽃이지만 장시간 걷는 일은 쉽지 않다. 숨이 턱까지 찰 때 벤치가 보인다. 팻말에`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커피를 마시며 시를 음미하고 꽃놀이하는 것도 한겨울에 누리는 여유요, 호사다. 이어 동백꽃 터널로 들어서니 잿빛 돌 수반에 떨어진 꽃잎 대여섯 송이가 수면위로 출렁댄다. 꽃송이가 붉은 입술을 열고 웃는다. 죽었다 다시 소생하는 꽃잎이 고와서 손을 담글 수조차 없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는 자승스님의 말씀이 꽃잎 위로 출렁댄다.

다복다복 피어 있는 꽃잎 위로 칼바람이 불어온다. 후드득~ 붉은 잎들이 떨어진다. 한두 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날리는 것이 아니다. 송이째 툭 목을 꺾는다. 꽃 진 자리가 허허롭지만, 붉은 잎들이 흙길에 내려앉아 꽃길을 내었다. 삶에 무거움일랑 내려놓으란다. 세상에 수많은 꽃이 존재하지만 필 때나 질 때도 아름다운 꽃은 동백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룰 때 미련 없이 제 몸을 던져버리는 꽃잎이 바라볼수록 눈물겹다. 붉은 꽃길을 걸어보라. 얼마나 환상적인가. 나이 든 사람의 외로움까지 달래주는 저 곱디고운 미인들…… 이 꽃길에 서면 얼어붙은 마음도 붉어지고 크나큰 위안을 받을 것이다.

떨어진 것들은 죽은 꽃이 아니다. 다시 생성한다는 희망의 꽃이리라.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처럼 지는 동백에서 나는 잠시 윤회의 생을 새겨본다. 이전에는 지는 동백이 이리도 황홀하다는 걸 미처 몰랐다. 이번에 동백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다. 때를 맞춰 피고 지는 일이 자연의 순리가 아니던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저 화려한 동백꽃도 때가 되면 지는 법. 저무는 일이 사람도 저리 고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람결에 붉은 꽃잎이 눈물처럼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을 바라보다 흩어진 내 지난 시간을 본다. 돌아보면 버리기보다는 욕심을 채우며 살아왔다. 난 왜 그렇게 크고 화려한 것에 연연하며 살았을까. 마치 평생 꽃피울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았던가.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돈이든 권력이든 놓아야 할 때 과감 없이 내려놓는 것이 아닐까. 이제 꽃피울 수 없는 빛바랜 나이지만 내 인생의 뒤안길은 동백꽃이고 싶다. 우아하게 지는 동백꽃처럼.

오랜만에 제주 동백숲길을 걸으며 꽃무리에 취해 꽃 같은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바람은 차가웠지만 겨울 동백꽃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