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끝까지
촛불,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끝까지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6.12.13 17: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 정규호

박근혜 대통령의 기이한 화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다. 그런 그가 국회 탄핵의결 전후로 두 차례나 “차분하고 담담하게”를 거론했다는 사실이 못내 거슬린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담담하다'에 대해, 형용사이며, ① 차분하고 평온하다 ② 사사롭지 않고 객관적이다 ③ 물의 흐름 따위가 그윽하고 평온하다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유의어로는 밝다, 선명하다, 평온하다를 소개하고 있으며 동음이의어로 물이 깊고 넓다는 뜻도 설명하고 있다.

온 나라 온 백성의 심기를 긁어 놓은 국정농단과 갖가지 의혹으로 인해 주말마다 사람들이 거리를 광장으로 만들어 촛불을 드높이고 있는 판에 `담담하게'라는 표현이 과연 타당한가.

하기야 `우주의 기운'이거나 `혼이 비정상'같은 말을 쏟아내고 심지어 굿판을 벌였다는 풍문마저 번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대통령 그만의 그 `차분함'과 `담담함'을 억지로라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도를 통달한 듯하니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은 한결 분명해 졌다.

최순실이 처음 검찰에 출두할 때 벗겨진 명품 신발이 화제가 됐던 것과 그 흐름이 동떨어져 있지 않은데, 언론들이 앞다퉈 남겨진 신발 한 짝과 놀라운 가격에 호들갑 떨었던 것은 소위 포퓰리즘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이다. 그때만 해도 상당수의 언론은 세상이 이토록 놀라운, 평범한 국민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비선에 의한 국정농단의 정도를 초월해 박근혜, 최순실의 공동정권으로 여겼을 정도라는 증언이 나오는 지경인데, `감시와 견제'라는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지 못한 채, 묵인 또는 동조했거나 따지려 들지 않았던 직무유기에 대한 (언론의)반성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본질에 있다.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했듯이 게이트의 몸통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우리와는 분명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검찰청사 앞에서 벗겨졌던 신발 한 짝이 36만원이나 된다는 호기심과 포퓰리즘으로는 장관 인선에 까지 결정적으로 관여하고, 규정을 뜯어고쳐서라도 명문대에 입학시키기까지 하는 문제의 본질에 절대로 접근할 수 없다.

국회의 탄핵 의결은 그렇다 치고 헌법재판소에서의 남은 과정에서 탄핵이 이루어진다 해도 한국 현대사의 온갖 모순과 질곡의 본질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촛불을 거둘 수 없는 이유는 지금이 그 고질적인 악순환을 끊어낼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멈출 경우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세상은 얼마든지 기어 나올 것이고, 제2, 제3의 최순실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이 우선인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2016년 겨울, 광장의 촛불에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본질을 지키기 위한 결연함은 그래서 끝까지 이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간절한 진정성이,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차분하고 담담하게'는 지금 현실의 대통령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광장을 지키는 촛불 국민에게 딱 맞는 말이다.

차분하고 담담함은 국민이 차지해야 한다. 거기에 `당당함'과 `끝까지'를 더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