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들다
스며들다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6.12.1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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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오후.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명랑하다. 투명하면서도 까슬한 빛이 반가워 온몸을 담그고 병아리처럼 앉아 있다.

독감이 스며든 몸으로 햇살이 내려앉는다. 따스하다. 초록빛 도톰한 호야 이파리, 열매에 발그레 붉은빛이 돌기 시작하는 커피나무, 앙증맞은 흰 꽃을 층층이 달고 있는 접란. 벽에 걸린 `아름다움의 시원-겨울 강'에도 빛은 가득하다. 속내를 보이지 않으나 둥글둥글 등이 굽은 겨울 강, 정지된 듯 고요한 풍경 속으로 스며든 소리 들을 상상한다. 등 푸른 물고기를 품은 강은 분주한 현실로부터 떠나온 누군가의 봄날 휴식도 수직으로 쏟아지던 한여름 장맛비의 두드림도 억새 숲을 지나온 바람의 노래도 얼음장 아래 흐르지 않는 기억으로 담아두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햇살의 온기 덕에 따끈해진 무릎과 달리 속으론 아직도 으슬으슬 한기가 도는 몸을 추스르다 생각한다. 지난 한 해 나의 내면엔 어떤 기억들이 스며 있을까. 흐르지 않는 시간으로 머물러 있는 삶의 편린들엔 무엇이 있을까. 부러 애쓰지 않아도 12월이면 으레 지난 일 년을 더듬어보게 되는 것이 몸에 각인된 기억인가보다.

사실 예전엔 이맘때면 마음이 가랑잎처럼 팔랑거렸다. 계획과 달리 미처 해내지 못한 일에 속상해하며 냉정하게 자신을 몰아세우곤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올해는 한 해가 가고 옴에 특별한 감흥이 없다. 기대하고 꿈꾼 일도 없으니 아쉬운 일도 없다. 심심한 오후 세 시 같다.

병원을 몇 차례 들락거리긴 했지만 장기 입원할 일은 없었으니 감사하고 올곧은 책 벗들을 인연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으니 즐거웠다. 하지만 이런 무채색 감정들. 때론 무욕처럼 느껴지는 이런 마음이 인생의 성숙에서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사라진 데쳄버 이야기>의 데쳄버 왕이 사는 세계는 태어날 때 모든 것을 익히고 배운 완전한 존재로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몸은 점점 작아지고 기억력도 흐릿해지지만 상상력은 오히려 무한해지고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결정권이 세진다.

무한한 가능성과 꿈을 갖고 태어나지만 나이가 들수록 욕망만 커지고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꿈은 작아지는 우리네 삶과 정 반대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 아주 작고 하찮은 존재처럼 생각된다는 주인공과 달리 데쳄버왕은 자신이 아주 커지는 느낌이라고. 우주 전체가 되어 별들이 자신 안에 있는 느낌이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가지고 있는 욕망이 클수록 자신이 하찮은 존재처럼 여겨지는 건 아닐까. 먼지처럼 보이지 않게 작아지면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 간 곳을 모르게 되는 데쳄버 나라의 죽음처럼 욕망을 비울 때 비로소 가벼워질 수 있음이다.

이제 햇살은 다소 온기를 잃은 채 그림 속 강 건너 산 리듬처럼 흘러가는 원색의 곡선에 빨강, 노랑, 초록빛으로 스며든다. 겨울 강은 봄 같은 생명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 늘어진 몸을 곧추세우고 새 다이어리에 정성스레 이름을 쓴다. 검은 잉크가 천천히 스며들며 반짝반짝 빛난다. 골목골목 구불구불 스며든 촛불들이 새 나라를 꿈꾸게 하는 희망이 되듯 몸에 스며든 겨울 한기도 새 꿈을 키운다. 12월은 꿈꾸는 달. 데쳄버왕이 그리워지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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