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문화
체면문화
  • 박경희<수필가>
  • 승인 2016.12.11 19: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박경희

우리 부부가 사는 빌라는 10년 전 새집이었을 때 입주한 `우리 집'이다. 어떤 형태의 집이든 `자기 집'에 산다는 것은 행운이며 감사할 일이다. 집 없는 설움의 마음고생은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집 없는 설움을 겪어본 사람은 `우리 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가 어떤 것인지 잘 알 것이다. 셋집 설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알지 못한다.

와세다대학 문학부 출신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아무도 모른다'는 작품이 있다. 2004년 칸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조연상을 받은 영화다.

각각 아버지가 다른 네 아이를 데리고 새로 얻은 연립식 셋집에 이사 가는 날 큰아이 둘은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제일 작은 애는 가방에 넣어 운반한다. 엄마가 집주인에게 애가 하나 뿐 이라고 속였기 때문이다. 그 애들은 낮에는 밖에 나가지 못한다. 여럿이라는 사실을 들키면 쫓겨날 수가 있고 다시 새 셋집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자기 집이 없는 사람에게 셋집살이는 그렇게 고달픈 것이다.

우리 앞집은 처음부터 세입자들이 살았다. 그동안 세 가족이 이사 왔다 갔으며 이사를 오고 다시 이사 가는 세입자들의 얼굴을 보면 깊은 그늘이 있다. 심한 경우는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부부가 세입자인 경우도 있었다. 한 가족이 `제집'을 마련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이번에 이사 오는 신혼부부도 역시 세입자다. 매일 그 집 문앞에 배달되어 주인 오기를 기다리는 물건들을 보면 모두가 `혼수'다. 저녁때가 되면 결혼식을 앞둔 두 젊은이가 와서 그 물건들을 안으로 옮긴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면 다시 다른 물건들이 택배로 배달되어 쌓이곤 한다. 지금은 셋집에 살아도 혼수는 모두가 고가의 물건들이며 품목도 다양하다.

사회 풍조가 그렇다.

나는 경험을 통해, 그 수많은 물건이 몇 번의 이사가 끝나고 나면 부상병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큰 물건일수록 상처가 심하고 섬세한 물건일수록 더 잘 깨진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집'을 마련했을 때 제 모습으로 살아남은 물건은 거의 하나도 없게 된다. 그래서 큰 돈을 들여 거의 전부를 새로 장만해야 한다. 이런 일은 그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지금도 수많은 신혼부부가 비싼 혼수를 장만한 채 셋집을 전전한다. 그동안 그것들은 다 깨지고 못쓰게 된다. 집이 먼저고, 그 안에 들여야 할 물건이 나중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순서가 뒤바뀐 채로 있는 것인가.

제일 큰 이유는 체면이고 다음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예식장을 비롯한 관련업체들의 횡포도 빼놓을 수 없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상업주의다. `일생에 한 번 뿐인 경사' 가 그 부적이고 여기에 허영심과 무지가 겹쳐 그 많은 돈이 장사꾼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유교문화권'에 있다. 그런데 본질은 사라지고 체면문화(體面文化)라는 파생체계가 우리의 덫이 되고 말았다. 남의 눈, 남의 평가, 남의 기준을 의식하는 허례의식과 허장성세가 그것이다.

다른 일에는 그렇게 영악한 지금의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이 함정에 빠지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지나고 보면 부질없는 것임을 먼저 깨달아 아는 게 지혜다. 체면 때문에, 허세를 부리느라 그 큰돈은 엉뚱한데 다 써 버리고 결국은 셋집으로 전전하는 이 모순을 이제는 끊어야 한다. 잘못된 것을 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다면 많이 배웠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