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
상당산성
  • 박상일<청주문화원 수석부원장>
  • 승인 2016.12.0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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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박상일<청주문화원 수석부원장>

상당산성은 오랜 시절 지역과 나라를 지켜온 호국의 보루이다. 미호천 들녘에서 바라보는 상당산성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위엄이 넘치고 든든하다. 주말이면 전국에서 찾아오는 탐방객으로 늘 인산인해다. 조선시대 충청도병마절도사가 관리하던 관방시설이지만 오늘날 상당산성은 심신의 휴식처이며 가벼운 산행 장소로 더욱 사랑을 받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이만한 유적이 있다는 것,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다가가서 한 시간이면 성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그날 만든 싱싱한 두부김치 안주 삼아 막걸리 한 대접으로 컬컬해진 목을 축일 수 있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청주시민의 큰 행운이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옛 사람이 이곳을 서원8경의 하나로 꼽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조선 초기에 양성지가 일찍이 갈파하였듯이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이다. 그중에서도 충청북도는 전국에서 성곽이 가장 밀집된 지역일 뿐만 아니라 각 시대를 대표하는 성곽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삼년산성과 충주산성 온달산성이 삼국시대를 대표하고, 미륵산성 대림산성 덕주산성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산성으로 유명하다. 상당산성은 조선시대에 축조된 전국의 많은 성곽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둘레 4.2㎞에 이르는 성벽의 성돌 하나하나를 다듬어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았고, 그 안에 병영이 갖추어야 할 시설들이 모두 있었다.

이 산의 이름은 본래 상령산(上嶺山)인데, 지금은 거의 잊어진 이름이 되었다. 모두 상당산성이라 부르다보니 본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마 1950년대 이후에 그리된 것 같다. 1947년에 지어진 청주대학교의 교가에는 낭성산이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산성 이름은 분명 백제시대 상당현에서 따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백제 때 축조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통일신라 유물이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서원소경 시절에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형태는 확인할 수 없고, 지금의 산성은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에 축성된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 상당산성을 중시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해서다. 왜군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한양도성으로 향했으니 곧 조령과 죽령과 추풍령이다. 세 길 모두 충북을 지나다 보니 지역의 피해가 엄청났던 것은 불문가지이고, 충북지역이 뚫리면 곧바로 한양성이 위험하다는 사실이 공론화되었다. 1596년(선조 29)에 선조는 원균을 충청병사로 임명하여 상당산성을 쌓도록 했고, 또한 이시발을 찬획사로 최립을 관성장으로 삼아 축성토록 했으나 무너지는 바람에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효종은 1651년(효종 2)에 충청병영을 해미에서 청주로 이전했다. 청주가 삼남으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군사적 거점이 된 것이다. 청주읍성에는 종2품의 병마절도사가, 상당산성에는 종3품의 우후가 각각 주둔하여 충청도 54개 고을의 육군을 총괄했다. 이후 숙종 말년(1716~1720)에서 영조 때까지 체성과 성문 수문 암문 여장 등을 수개축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구룡사와 남악사 등 사찰도 이때 세워졌다.

1728년(영조 4)에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청주읍성을 지키던 절도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이 죽고, 상당산성도 반군에게 점령되었다. 동북 암문구간의 축성책임자였던 양덕부는 성문을 열어 반군을 끌어들였고, 우후 박종원은 투항했다. 상당산성의 보수는 1890년(고종 27)까지 이어지다가 1895년에 폐쇄되어 방치된 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유적도 사라지고 기억에서도 점차 잊혀졌다. 오늘도 성벽 위를 걷는 이들의 발길에 산성의 역사와 숱한 사연을 간직한 기왓장들이 차이고 스러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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